지리산국립공원 직원으로 30여년을 근무했었던 조종대씨가 있습니다. 함양문인협회 회원이기도 한 그는 가끔 모임에서 만나면 늘 호탕하게 웃으며 지리산 자랑을 합니다. 지리산 근처에 온다면 먼저 자기에게 허락을 받으라고 합니다. 자기를 빼놓고 지리산을 지나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기야 30여 년 간 지리산을 오르내리며 살았으니 지리산은 그의 작은 손바닥 안에 들어 와 있는 손오공의 손금인 것입니다. 산에서 단련되어진 탄탄한 몸매로 등산복 차림에 배낭 하나 어깨에 걸치고 나타나는 그를 보면 60 후반을 넘은 나이라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작은 대화를 하더라도 지리산 뇌우처럼 쩌렁쩌렁 했으며 특히 여자들 앞에서의 약간 과장된 허세와 허풍은 지리산이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다 지리산 정기를 받아 그렇다고 주장합니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사십 평생에 지리산 한번 오르지 못함을 한탄했었습니다. 나도 육십이 넘어 지리산 천왕봉 한번 오르지 못함에 대해 함양에 사는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라고 늘 부끄러워합니다. 어찌어찌 백두산 천지도 한라산 백록담도 올라 구경했는데 지리산 천왕봉은 아직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나날이 건강이 나빠져 자신이 없어 죽기 전에 한번 천왕봉 정상까지 내가 오를 수 있을 것인가는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면 당뇨병을 앓아 온지 20년이 되므로 섣불리 나섰다가는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해 한해 더 미루다가는 갈수록 어려워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알기에 나는 큰맘을 먹고 장대한 계획을 세워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먼저 운동을 시작하여 체력을 키워야 합니다. 가까운 산들을 몇 번 오르고 나서 몇 개월 후 가을 쯤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리라 마음먹습니다. 조종대 시인에게 미리 안내를 부탁했더니 흔쾌히 허락하며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핸드폰도 있고 헬기도 있으니 걱정을 하덜 말라 합니다. 중도에 오르지 못하면 자신이 업고라도 천왕봉을 구경시켜 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조종대가 나서면 지리산 마고할매도 꼼짝 못한다고 큰소리칩니다. 옛 문헌을 미리 읽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냥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옛 선현이 오르며 보고 느끼고 생각했었던 그 맛과 멋과 풍류를 짐작하고 싶었습니다. 나도 글 쓰는 묵객(墨客)인지라 그분들과 같이 문장과 시문을 짓고 답하며 두류산을 오르고 후에 유람기를 하나 남긴다면 옛 것과 비교가 되어 좋지 않을까. 이른바 수백 년이 지난 뒤 ‘신 두류산 유람기(新頭流山遊覽記)’가 새롭게 다시 이어진다면 비교도 되고 좋지 않겠는가 생각해봅니다. 지리산에 관련하여 쓴 글들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1453년 이륙의 「유지리산록」. 1472년 점필재 김종직이 한인효. 조위. 유호인 등 4명과 두류산을 오른 후 쓴 「유두류기행록」. 1487년 남효온의 「지리산일과」. 1489년 김일손의 「속두류록」. 1558년 조식의 「두류산 유람록」.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1618년 조위한의 「유두류산록」 이 있습니다. 이 글들을 읽으면 평생 한 번의 지리산 등정이 얼마나 힘든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이 허락하지 않으면 산행을 할 수 없습니다. 하루에 열두 번 변하는 날씨가 허락하지 않으면 한치 앞을 내다 볼 수도 없고. 내를 건너 나아갈 수도 없고 고립 됩니다. 그야말로 지금의 히말라야 산정 등반과 같은 일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길도 차도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 한양에서 또는 가까운 경상도라 할지라도 걸어서 심심산골 두류계곡 지리산 마을까지 온다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인들에게 밥이며 식품이며 잠자리며 이불이며 짐을 지게 하여 따르게 합니다. 또한 산의 호랑이. 곰 같은 짐승의 두려움이나 도적떼나 마을의 험한 사내들의 행포에 대한 생명의 위험들이 곳곳에 도사려 있습니다. 도깨비 공포를 어찌 감당할 것입니까. 등산로가 있는 것도 아닌 산길을 헤치며 나무와 가시덤불을 칼과 낫으로 치며 산을 오릅니다. 실로 밀림 생존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위험한 대 탐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확천금을 만나는 유물이나 보물을 찾아나서는 아마조네스의 대탐험도 아닌데 왜 옛 선인들은 지리산 천왕봉을 평생에 한번 오르고 싶어 했을까요? 선현들의 책을 읽어보니 감동에 감동입니다. 김종직이 함양태수로 재직할 때 차를 공물로 바치는 백성들의 수고로움에 연민을 가졌습니다. 삼국사기에 지리산에 차나무가 있었다는 자료를 찾아내고 그렇다면 어찌 그 차의 씨앗이 없겠는가 하여 차나무의 흔적을 찾게 합니다. 마천 엄천사 북쪽 대나무 밭에서 씨앗을 발견합니다. 그 씨앗으로 관영차밭을 일구어 차를 재배하여 공물을 바침으로서 백성의 고통을 덜게 하는 구세제민의 사상은 실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함양군에서는 문정마을 쪽에 그를 기리는 관영차밭 시비를 세워놓았지만 녹차밭은 아직 조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서울의 사대부들이 즐기는 유희 매놀음 때문에 매를 잡기 위해 백성들이 고산에서 한겨울 추위에 떨며 눈보라 속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보며 사람으로서 하지 못할 짓임을 통탄해 하는 모습은 가히 관리의 애민사상을 흠모하게 합니다. 지리산의 노모는 마야부인이 아니라 고려 태조 왕비 위숙왕후라고 바로 잡기도 합니다. 고운 최치원이 찾지 못한 선인들만 살고 있다는 지상낙원 청학동 이야기도 나옵니다. 백두대간에서 흘러간 산이라 하여 두류산(頭流山)으로 불리워진 지리산. 「승려 계징이 지리산을 유람하러 가기에 주는 글」에서 김종직은 “금강산은 동쪽에 웅장하고 묘향산은 북쪽에 웅장하고 구월산은 서쪽에 웅장하지만 남쪽 두류산을 오르면 곧 웅장하게 보이던 세 산은 눈 아래에 깔려 있어 흙무더기와 같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유몽인은 1611년 「유두류산록」에서 천왕봉에 올라 말합니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4000리 뻗어온 아름답고 웅혼한 기상이 남해에 이르러 우뚝 일어난 산으로 열두 고을이 주위에 있고. 사방 둘레가 2000리나 된다. 안음(安陰안의면)과 장수는 그 어깨를 메고. 산음(山陰산청군)과 함양은 그 등을 짊어지고. 진주와 남원은 그 배를 맡고. 운봉과 곡성은 그 허리에 달려 있고. 하동과 구례는 그 무릎을 베고. 사천과 곤양은 그 발을 물에 담근 형상이다. 그 뿌리에 서려 있는 영역이 영남과 호남의 반 이상이 된다.” 얼마나 정확히 본 묘사입니까. 현재 지리산 등산 코스는 18개나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심자들은 남쪽 중산리 코스나 그 반대편인 북쪽 마천 백무동 코스를 선택합니다. 지리산을 지금까지 800번 올랐다고 하는 청학동 다오실 주인 성락건씨가 자신이 지은 책 「지리산」을 내게 주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지리산에서 살고 지리산을 사랑하고 마침내 지리산 산속에서 멋지게 죽을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다고 말합니다. 천왕일출. 반야낙조. 노고운해니 하며 지리산 십경이 있지만 그가 추천한 지리산 십경은 다릅니다. 1 삼신봉에서 지리능선 조망 2 반야봉 구상나무 수림 3 만복대 능선의 철쭉 안개 억새 4 촛대고원 나물군락 5 뱀사골 불견광음천 6 영신대 수도처 7 한신계곡 자작나무숲 8 적막한 덕평고원 9 왕등의 늪지대 10 음양수에서 영신봉에 이르는 길을 추천합니다. 언제 어떻게 누구와 함께 두류산에 들 것인가? 생각하니 이미 생각만으로도 두류산행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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