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이 저물고 있습니다. 오월이 지척이네요. 곡우가 지났는데 뒷마당 텃밭은 아직 잠들어 있습니다. 해마다 나는 겹벚꽃과 끈끈이대나물이 피는 시기를 봄 농사의 시작으로 삼아왔습니다. 겹겹이 포개어 피어나는 겹벚꽃을 봄이 지나가는 간이역처럼 생각했지요. 하지만 올해는 그..
4월 중순, 전국에 눈이 내렸습니다. 이 시기에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린 적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벚꽃 위에 수북이 쌓인 눈, 그 자체는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눈송이와 꽃송이가 어우러진 풍경은 현실이라기보다는 만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눈 쌓인 벚나무 아..
긴 겨울을 견디며 스스로를 달게 만든 곶감처럼, 내 마음에도 오래도록 익어온 발효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찬바람에 흔들리며 조금씩 맛이 들어가는 곶감을 바라보며, 기다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왔습니다. 감이 달아지기까지의 그 더디고 조용한 숙성처럼, 이번에 나는 또 하..
종일 하늘만 바라보다 한숨 짓고 고개 떨 군 하루, 이럴 때는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 재인가를 절감합니다. 평소엔 내 의지로 세상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자연 앞에선 그저 무력한 존재가 됩니다. 며칠 전부터 비 소식이 있었기에 마음 한 켠에 기대를 품었지만, ..
바람에 흔들리는 목련꽃이 더없이 아름답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순백의 꽃잎으로 피어날 수 있을까, 한참을 바라보다 그 결을 따라 눈길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 시선 끝에 머무는 것은 꽃잎 너머 피어오르는 연기입니다. 연초록의 기운이 채 퍼지기도 전에, 짙은 회색의 버섯구름..
김선희 씨를 칭찬합니다. 물론,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전국의 수많은 김선희 씨가 “나를 칭찬한다고?”라며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김선희 씨는 조금 다릅니다. 함양에서 남편과 함께 두 아이를 키우며, 수제청 공방을 운..
“곶감을 받았는데요… 때깔이…” 갑자기 걸려온 고객 전화 첫 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저녁을 먹던 중이었는데 단골 고객의 이름이 떠서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곶감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지 이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런 전화를 받아본 것이 한두 번이..
농업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입니다. 모종을 심고, 물을 주고, 수확하는 과정은 같을지 몰라도, 그것을 둘러싼 환경과 도구, 그리고 시장의 흐름은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이제 농업은 단순한 생산이 아니라, 이야기이고 경험..
함정농은 교육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함양의 자발적인 농업인 단체입니다. 해마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농업인들이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한 역할입니다. 올해의 3, 4월에 인스타그램 릴스, 스레드 교육이 예정되어있고, 하..
우수에는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데, 비는 커녕 엄천강이 짱짱 얼어 붙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봄이 올 것 같았는데 말입니다. 지난해 이 맘때는 산책길에 개구리 울음소리 들렸는데, 오늘은 어찌나 바람이 매서운지 산책길이 고난의 행군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주에서 매화 ..
농부가 도대체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도시에서 어린이 영어동화 서점을 운영하다가 이십여 년 전 귀농한 이후, 생계를 위해 시작한 일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이제는 손에 꼽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곶감 농사부터 시작해서 떡카페 운영, 갤러리 운영, 온..
우와~ 탄성이 터져나왔습니다. 요즘 핫한 스레드에서 스친이 올린 짧은 영상을 보는데, 컵에 담긴 아이스크림이 귀여운 강아지로 변신하는 마술 같은 영상이었습니다. 영상은 챗지피티 SORA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프롬프트 몇 번 수정해가며 만들었답니다. 세상에~ 몇 마디 ..
갤러리 귀함이 함양에서 작품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오픈과 동시 권현숙 선생이 지도하는 어반 스케치 회원들의 수채화 전시를 시작으로, 최상두 생태 사진전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중견작가 4인이 참여하는 여유자작 판화전 등 다양한 전시 일정이 계획되어 있으며..
며칠 전, 스레드(threads)라는 새로운 SNS를 접했습니다. 낯선 플랫폼이었습니다. 인스타그램이 사진과 영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공간이라면, 스레드는 그 반대입니다. 글을 앞세워 이야기의 중심을 잡고, 사진은 보조의 역할에 머뭅니다. 이 모습이 왠지 모르게 반갑..
“아이코~ 올해는 설이 빨라서 걱정이야”칠선계곡에서 곶감을 만드는 친구 허농부의 목소리에는 한숨이 묻어납니다. 매년 이맘때면 설명절이 얼마 안 남았는데 주문이 없다며 푸념하곤 하지만, 설이 점점 다가오면 말투가 185도 달라집니다. “곶감이 동이 나서 아쉽네~ 주문이..
2024년의 마지막을 넘기며, 지난 한 해는 특히나 길고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비상계엄이라는 말이 우리 일상 속에 갑작스럽게 등장하고, 그 혼란 속에서 우리는 안온한 일상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연말에 발생한 항공 참사는 그 불안감을 더욱 깊은 슬픔으로 물들였습니다. 수..
덕장에서 곶감을 내리며 당도를 측정해 보니 47브릭스가 나옵니다. 그 숫자 앞에 멈춰 서서 잠시 안도합니다. 이제 하우스에서 며칠만 더 후숙시키면 55브릭스까지 올라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눈앞의 숫자가 새삼 마음을 울립니다. 완벽에 가까운 55브릭스에는 닿지 ..
기온이 부쩍 내려가 벽난로에 불을 넣었습니다. 벽난로에 장작을 넣는 일은 번거롭지만,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퍼지는 온기는 무엇보다 따뜻하고 정겹습니다. 불꽃이 춤을 추듯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 깊은 곳까지 온기가 번져오는 듯합니다. 겨울이란 이..
시골에선 그림 한 점, 시 한 줄을 마주하기가 어렵습니다. 도시의 화려한 갤러리, 북적이는 전시장과는 거리가 먼 시골 사람들에게 문화는 마치 먼 곳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의 사람들이 예술을 덜 사랑하거나, 아름다움을 덜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오..
고향 친구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부산행 시외버스에 올랐습니다. 한때는 익숙했던 이 길이 이제는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내가 떠나온 뒤로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어린 시절 영원히 그대로일 것 같던 공간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