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이 저물고 있습니다. 오월이 지척이네요. 곡우가 지났는데 뒷마당 텃밭은 아직 잠들어 있습니다. 해마다 나는 겹벚꽃과 끈끈이대나물이 피는 시기를 봄 농사의 시작으로 삼아왔습니다. 겹겹이 포개어 피어나는 겹벚꽃을 봄이 지나가는 간이역처럼 생각했지요. 하지만 올해는 그 꽃들이 다 지도록 호미를 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말 또다시 꽃샘추위가 오기 때문입니다.올해부터는 텃밭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오랜 시간 교단에 섰던 아내가 퇴직 후 집에 머물게 되었고, 관심이 자연스레 텃밭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봄 햇살 아래에서 아내는 호미를 들고 고랑을 정리하고, 하루라도 빨리 모종을 심고 싶어 안달입니다. 하지만 나는 말립니다. 급한 마음은 계절의 걸음을 재촉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찬 기운이 스쳐 지나가기 전까지는, 기다림이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농사는 언제나 자연의 순서를 따르는 은유이니까요.무엇을 심을까? 생각해 봅니다. 작년 끔찍했던 폭염 속에서도 꿋꿋이 자라 열매를 맺어준 방울토마토, 가지, 땅콩, 고추는 올해 다시 심을 예정입니다. 반면 참외, 복수박, 호박은 작년 여름 폭염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고구마도 여러 고랑을 심었지만, 가을이 되어 캐보니 알밤만 한 것들만 몇 알 손에 잡히고 말아, 그저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뒷마당 텃밭조차 날씨 앞에서 이토록 겸허한데, 생업으로 하는 농사는 또 어떻겠습니까. 사월 중순, 제법 많은 눈이 내렸었지요. 그 눈은 갓 핀 사과꽃과 배꽃을 얼렸습니다. 사람들은 이 현상을 ‘이상기후’라 부르지만,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그게 본래의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고종시 감의 주산지인 산청군 시천면에서 시작된 대형 산불은 열흘 넘게 이어지며 많은 감나무를 삼켰습니다. 곶감을 말리는 이들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었고, 현지 지인의 말에 따르면 올해 고종시 곶감의 원료는 심각한 품귀현상을 겪을 것으로 보입니다.자연은 언제나 먼저 말을 걸고, 인간은 그 목소리를 듣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기후를 바꾸었다면, 이제는 그 변화 앞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갈지를 깊이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심고 거두는 일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쩌면 위로입니다. 인간의 삶이 자연과 얼마나 밀접하게 묶여 있는지를 일깨워주고 있으니까요.마지막 꽃샘추위가 지나가기를 기다려봅니다. 아내는 텃밭에 봄을 심을 준비를 하고 있고, 나는 그 곁에서 말 없는 계절과 눈을 맞춥니다. 자연은 언제나 스스로의 시간에 따라 움직일 뿐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순응하며 배우는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저 조금 더 기다릴 뿐이고, 온전한 봄은 반드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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