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림·하림 아닌 ‘대관림’ 복원해야”최광식 교수는 이번 국제학술대회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서 함양 상림의 유래와 상림의 모체를 고증하고, 대관림의 개념 및 대관림 복원에 대해 주장했다. 최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시대 문헌에는 ‘상림(上林)’이라는 표현은 없고 ‘대관림(大館林)’이라고 기록에 남아 있다. 상림은 본래 중국 ‘황제의 숲’을 의미하는데, 하나라의 상림(桑林), 상나라의 태원(太苑), 주나라의 영유 등은 제천의례를 지내며 백성들과 향유하는 곳으로, 황권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진시황이 막대한 인력과 물력을 동원해 함양군 크기만 한 상림원(上林苑)을 건설했다. 이후 한무제는 진나라의 상림원을 확대해 자금성 면적의 20배가 넘는 상림원을 조성하고 황제의 존엄성을 드러냈다 전해진다. 한편 수양제는 서원(西苑)을 건설했다. 이곳은 황실에 땔감을 제공하고, 건축자재·채소·양식 등을 생산하는 역할을 하며, 사냥을 하고, 궁에 물을 제공하는 시설로 이용됐다. 최광식 교수는 “수당 때부터 군사기능을 강화해 백성들은 이곳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왕조에 들어서는 경제생산 및 군사주둔 기능을 갖춘 금원(禁苑)을 건설했다. 또한 진한시대의 상림원은 땔감 공급, 과일과 채소 생산, 건축자재 생산, 광물 채취, 화폐 발행, 피서, 사냥, 낚시 등을 하는 기지로 활용됐다. 진한대 황제의 숲인 상림원은 당대에 들어서면서 경제적 기능, 제의적 기능, 경관용 기능에 더해 군사적 기능을 더욱 강화하면서 금원(禁苑)이 됐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상림은 신라나 고려시대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고,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고 있다. 태조는 동산색(東山色)을 상림원(上林園)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담겨 있는 것이다. 상림은 조선왕조 초기 경복궁을 건설하면서 궁에 조성됐으며, 창덕궁 건설 시에도 궁 내에 조성됐다는 것이다. 정조가 지은 ‘상림십경’에서는 상림에서 꽃을 가꾸고 새와 짐들을 기르고, 제의를 지내며, 과거시험을 치렀으며, 활쏘기 등 군사훈련을 했다고 기록돼 있어 중국 상림의 기능과 비슷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최 교수는 “조선시대 상림은 ‘임금의 정원’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상림’이라는 말을 쓸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신라시대 최치원이 건설한 함양의 상림(上林)은 그 유래를 대관림(大館林)에서 찾을 수 있다. 함양군수였던 김종직이 1474년 유호인에게 보낸 시에 대관림에서 술을 마시며 외로움을 달랬다는 내용이 있다. ‘대관’은 목사나 군수, 현감이 집무하는 관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대관림아 ‘관아가 관리하는 숲’이라는 뜻이다. 최치원이 천령군(현 함양군) 태수로 임명받았을 때 기후변화로 홍수와 가뭄이 반복되는 시기였으므로 농민들과 함께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가뭄과 홍수에 대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당시 최치원은 방로태감이라는 무관직을 겸직했는데 <삼국사기> 기록을 분석하면 붉은 바지를 입은 적고적(赤袴賊)의 침략이 있어 군사방어적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유추했다.최 교수에 따르면 최치원은 경주의 계림이 가장 중요한 모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경주는 북천, 남천, 서천이 범람해 이 일대에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는 역사를 반복했다”며 “통일 이후 월지를 조성하면서 월성 근처 발천 물을 다스리는 수리체계를 계림과 연결시켜 확립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치원은 북천과 발천의 배수체계와 조림사업을 참고해 함양에 대관림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한편 대관림 상림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인 것으로 분석했다. 옛 문헌과 구술채록에 따르면 1936년 대홍수로 대관림이 분리되면서 상림과 하림으로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대홍수 이후 하림 빈 터에 비행장이 들어서고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대관림의 상부와 하부가 완전히 나뉘었던 것이다. 최광식 교수는 “상림과 하림은 앞으로 ‘대관림’으로 복원돼야 한다”며 “하림 일대의 건물과 군부대 이전, 논밭 등을 정리해 대관림의 제 모습을 찾는다면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재할 만큼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최초 외국인 위인 기념관”중국 양주에 위치한 최치원기념관은 중국 외교부 승인을 받은 최초의 외국인 위인 기념관이다. 이곳을 운영하고 있는 이빈 관장은 이번 국제학술포럼을 통해 최치원기념관의 역사와 지난해 새롭게 개편한 최치원 전시에 대해 소개했다. 최치원기념관은 2024년 6월부터 9월까지 기존 전시 ‘천년의 기억을 뛰어넘어 - 최치원과 양주’를 전면 개편해 10월 초 공사를 완료했다. 해마다 이곳에서 최치원 제향 행사를 개최하는 가운데, 지난해 10월15일에는 제향과 더불어 경주최씨중앙종친회와 양주의 교류 25주년 기념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빈 관장은 “특히 이번 전시는 시각적 표현과 체험형 콘텐츠에서 질적 도약을 이뤄, 중국의 지도자와 한국 측 귀빈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고 전했다. 중국 양주당성유적지발물관과 한국의 경주최씨중앙종친회는 최치원 선생을 계기로 지난 2000년부터 교류를 시작했다. 2001년 박물관 연화각(延和閣) 2층에 ‘신라의 친선사절 최치원과 양주’라는 제목으로 최치원 사료전시실을 개설했으며, 2006년 10월, 중국 외교부의 승인을 받아 연화각 동측에 최치원기념관 건립을 시작해, 2007년 10월 한-중 수교 15주년을 맞아 기념관이 완공됐다. 2016년에는 양주 최치원기념관은 양주시 촉강-수서호 풍경명승지 관리위원회(이하 위원회)에 귀속되면서 약 3000만 위안(한화 약 60억 원)을 투입해, 최치원 동상과 생애사적을 배경 부조로 한 최치원광장을 조성했으며, 2018년 기념관 건물과 부대 서비스시설, 주변 녹화 환경 전반에 걸친 보수 및 개선 공사를 진행했다. 2019년에는 ‘인백기천(人百己千)’ 기념비를 신설하고 연구학습 여행 테마 상품을 확장, 새만금 문화학당(新萬金文化學堂)을 재개했다. 2012년 공개된 ‘천년의 기억을 뛰어넘어 최치원과 양주’ 전시는 10여 년간 유지되며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러다 코로나19 이후 2023년 상반기 전시 개편 마스터플랜 및 설계안 수립을 본격 추진하면서 했다. 2023년 7월 위원회 대표단의 한국 방문 당시, 설계안 초안을 직접 경주최씨중앙종친회에 전달하고 전시 개편 과정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다.이를 통해 전시 내용을 전면 업데이트하고, 시각적 구성을 최적화했으며, 멀티미디어 장비를 활용해 관람객의 체험과 참여도를 높였다. 이를 통해 관람객이 최치원 선생의 생애와 한중 우호 교류사에서의 위상을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이빈 관장은 “새 전시는 각계의 호평을 받았다”며 “이 작업에 참여해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다”고 말했다. 특히 새롭게 개편한 전시에서는 문자, 색조, 장식 스타일 등에서 당대의 미학적 경향, 양주 지역의 문화적 특색, 한중 문화 융합, 최치원의 문인 기질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해 타 전시와 차별화된 개성을 구현해냈다. 또한 최치원의 역사적 위상과 지대한 영향력에 핵심을 뒀다. 더불어 영상콘텐츠 터치스크린 자율관람 및 멀티미디어 체험존 등을 확대 설치해 관람객의 흥미를 높였다. 이 관장은 “양주 최치원기념관이 관리 및 서비스의 질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켜 최치원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한-중 문화 교류 증진과 양국 간 우의 강화에 더욱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최치원이 가르친 유교는 가부장적 유교 아냐”미국에서 한국학을 연구하고 있는 마크 피터슨 교수는 한국의 유교가 언제부터 어떻게 가부장적인 형태로 변질돼 왔는지, 우리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유교의 가치에 대해 발표했다. 피터슨 교수는 “최치원은 유·불·도를 통섭한 대단한 인물”이라며 “신라시대 유교적 이념을 내세운 대표적인 유학자”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에서 유교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신라부터 17세기말까지, 그리고 18세기부터 지금에 이르는 유교로 나뉜다는 것이다. 피터슨 교수는 과거의 유교와 최근까지 이어지는 유교는 크게 다르다고 주장했다. 현대인들에게 유교는 가부장적이고 부계사회를 지향하는 것으로 인식돼왔다. 그러나 피터슨 교수는 <유교사회의 창출>이라는 저서를 통해 한국의 유교가 언제부터 어떻게 부계사회(가부장적)로 변화했는지에 대해 저술하고 있다. 유교가 변화했다는 것은 △상속권 △제사 △족보의 형식 △남아선호 △입양·입후 △혼인법 △마을구조 등 7가지를 통해 알 수 있다. 17세기 말 이후부터 조선은 부계사회의 특징이 보이는데, 딸은 재산상속권을 갖지 못하고, 제사도 지낼 수 없게 된다. 족보는 남자 중심으로 기록되고, 남아선호로 인해 장남이 아들을 낳지 못하면 혈통 내에서 입양·입후를 했다. 또한 여성은 ‘시집’을 가고, 한 성씨가 마을을 이루는 집성촌·단성촌이 생겼다는 것이다. 피터슨 교수는 역사적 사료 등을 통해 이를 하나하나 검증했다. 조선 중기 학자인 율곡 이이의 상속 문서에는 7명의 남매가 부모의 재산을 평균으로 나눈 것을 알 수 있으며, 딸에게도 상속권이 있어 평등하게 재산을 분배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딸에 대한 상속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또한 제사 역시 과거엔 아들·딸 모든 자손이 번갈아 가며 모시는 윤행을 지켰지만, 1880년대 문서에는 ‘출가한 여자는 제사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족보의 경우에도 1476년에 쓰여진 <안동권씨보>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가 태어난 순서대로 모두 기록돼 있다. 그러면서 피터슨 교수는 청중에게 “나의 고조할아버지는 몇 명이냐”고 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명”이라고 답하자, 피터슨 교수는 “이것이 바로 가부장적인 사고”라며 ‘나’를 중심으로 윗대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인 ‘팔고조도’를 소개했다. 팔고조도를 보면 ‘나’에겐 부모 2명이 존재하고, 총 4명의 조부모(조부·조모·외조부·외조모)가 존재한다. 그 위로 8명의 증조부모가, 또 그 위로 16명의 고조부모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여성의 부모인 외가까지 족보에 모두 포함시킨 것으로, 기존 족보에서 여성이 제외된 것과 대조적이다.이와 더불어 조선 초기에는 아들을 낳지 못한 장남이 혈족 내에서 양자를 들이는 제도가 없었으며, 조선 후기에 족보·상속·제사 등의 문제로 남존여비 사상이 확대되면서 남아선호 현상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시집을 가다’, ‘장가를 가다’라는 표현이 있듯 과거에는 혼인방식도 선택이 가능했다. 피터슨 교수는 “이처럼 한국은 부계사회 이전에 ‘양계사회’였다”며 “현대에 와서 가부장적인 유교를 버릴 것이 아니라 오래된 유교 속에 남녀가 평등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유교 정신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는데, 유교는 남아 있어야 한다”면서 “미국 속담에 ‘목욕물 버리다 아기까지 버리지 마라(Don`t throw out the baby with the bathwater’는 말처럼 불필요한 것을 없애려다 소중한 것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최치원은 유교를 통해 부계사회를 지향하지 않았고,아들만 상속받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았으며, 장남에게 제사를 맡기거나 아들을 낳지 못하면 양자를 들여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면서 “오늘날 유교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최치원이 가르친 것과 같은 기본 유교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양주에 스민 최치원의 정신”… 한중 인문교류의 상징 재조명 ‘최치원과 한중미 우호 학술대회’ 제4 발표자로 나선 신양 중국 양주 최치원기념관 학예사는 ‘시공을 초월한 문화의 울림, 최치원과 양주’를 주제로 최치원 선생의 양주 시절과 그가 남긴 문화적 족적에 대해 깊이 있는 발표를 이어갔다. 신양 학예사는 발표 서두에서 양주라는 공간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짚었다. 그는 “양주 즉주의 정상, 슬림호의 안개와 고대 운하의 뱃길이 만나는 그곳에 최치원 선생의 정신적 뿌리가 자리하고 있다”며, “800년 전 신라인 문인은 스스로를 ‘외로운 구름’이라 불렀고, 800년이 흐른 지금, 그의 정신은 양주의 기념관 안에 다시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소개했다. 서기 884년, 당나라가 황소의 난으로 혼란에 빠졌던 시기, 젊은 문인 최치원은 양주에 머물며 도홍윤과 교유하고, 당대 문단을 뒤흔든 <토황소격문>을 집필했다. 신양 학예사는 “<토황소격문>은 단순한 비판문이 아니라, 시대의 혼란을 꿰뚫고 정의를 외친 지성의 울림이었다”며, “양주의 자연과 철학적 환경은 그의 사유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양주의 선지사, 서주천 일대, 대나무 숲과 운하의 풍경 등이 최치원의 문학에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고 분석했다. 신양 학예사는 “그가 남긴 <계원필경집>은 단순한 문집을 넘어 한중 문학 교류의 결정체이자 동아시아 지식 전통의 정수”라고 덧붙였다. 최치원의 문학은 이후 조선시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 문신 이규보는 그를 “이상치언”으로 평가했고, 조선의 이항로는 그를 성찰의 귀감으로 삼았다. 신양 학예사는 “그의 문장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의미를 직관적으로 전하는 힘이 있었으며, 시대와 문명을 초월해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발표에서는 최치원이 신라 불교의 토착적 색채와 중국 불교의 교리를 절묘하게 융합하여 새로운 서사 패러다임을 창조했다는 점도 강조됐다. <변정상황실기> 등 일부 유고는 신양 학예사에 따르면 양주에서 집필된 것으로, 중국 문인들에게도 깊은 교훈과 영감을 주는 문학적 자산으로 남아 있다. 신양 씨는 최치원의 유산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치 있는 인문 자산임을 강조했다. 그는 “양주 석탑사의 벚꽃이 경주 안압지 수면에 떨어질 때, <계원필경집>의 문장이 전시실 인터랙티브 스크린에 스며들 때, 우리는 두 민족의 천년 교류뿐 아니라 문명 상호존중의 영원한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문화는 외로운 봉우리가 아닌 울림 있는 산맥처럼 이어져야 한다”며, “이번 발표가 한중 인문 교류의 깊이를 다시금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앞으로도 최치원 선생의 유산이 두 나라를 잇는 인문학적 대화의 통로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고운 최치원 사상,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철학” ‘최치원과 한중미 우호 학술대회’에서 제5 발표자로 나선 최용춘 상지대학교 명예교수는 ‘고운 최치원 사상의 현대적 함의에 관한 소고’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고운의 철학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고운 사상의 핵심이 ‘동인의식’과 ‘동문인식’이라는 두 개념에 기반한다고 설명했다. 동인의식은 동국 또는 동방에 대한 자긍심, 즉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고유한 문화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뜻하며, 동문인식은 동서 문화를 평등하게 바라보는 시각으로, 문화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고운이 이러한 의식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 당나라 유학을 통해 외국 문명을 깊이 이해했기 때문이며, 이를 바탕으로 유불도 삼교를 아우르는 통합적 사유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사유의 밑바탕에는 고운의 좌우명이자 자기 수양의 철학이 담긴 문구인 ‘인백기천’과 ‘현자무가’가 있었다. 남이 백 번 노력할 때 자신은 천 번을 노력해야 한다는 이 격언은 고운이 학문과 실천을 대하는 태도를 잘 보여주는 말이며, 실제로도 그는 상투를 기둥에 묶고 졸음을 이기거나 허벅지를 찔러가며 글을 쓰는 등의 실천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최 교수는 이러한 정신이 없었다면 고운이 삼교를 회통하는 사유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운이 제시한 풍류사상도 주목할 만한 철학으로 평가됐다. 풍류는 단순히 ‘풍속을 교화하는 가르침’을 넘어 신적 존재에서 인간으로 나아가는 수행과 가르침의 체계로, 무교와 화랑 정신을 계승하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 일상과 예술의 융합, 갈등의 조화를 이끄는 고유한 통합 사상이다. 고운은 이를 ‘현묘지도’라 명명하며 유·불·도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으로 확립했고, 여백이 있는 사상으로서 오늘날 다양한 문화와 종교, 이념까지 수용하고 융합할 수 있는 철학적 토대를 제공한다고 최 교수는 평가했다. 고운의 풍류사상은 오늘날 ‘세움’, ‘나눔’, ‘깨우침’이라는 현대적 가치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는 환경·사회·지배구조(ESG)를 포함한 지속가능한 실천,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공유경제, 동반성장 등을 통한 공동체적 나눔, 그리고 집단지성과 의식혁명을 통한 사회적 각성의 철학이 고운 사상의 현대적 확장이라 설명했다. 함양의 상림원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지역을 보호한 사례는 고운 사상이 실천된 대표적인 예로 제시되었다. 최 교수는 고운 사상의 가치는 단순히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고운의 철학은 다문화 사회와 융복합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갈등을 넘어선 소통과 화합의 길을 제시하고, 민족의 동질성과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안으로는 주체성, 밖으로는 조화라는 고운 사상의 중심 축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과도 맞닿아 있다”며, 고운 철학이 지닌 시대 초월적 가치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계속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최치원의 사상과 문화교류 가치 재조명   임종찬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최치원과 한중미 우호 학술대회’ 각 발표에 대한 총평을 통해 발표 내용의 의의와 현대적 시사점을 짚었다.최광식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상림과 대관림’을 주제로 발표한 내용에 대해 임 교수는 “기존의 가뭄·홍수 대비설을 넘어서 군사적 방어 목적까지 해석을 확장한 착상이 인상적”이라며, “견훤의 후백제 건국으로 위기감이 컸던 시기에 숲이 은폐나 공격 수단이 될 수 있다는 해석은 가능성 있는 접근”이라고 평가했다. 이빈 양주최치원기념관 관장이 양주 기념관의 설립과 운영에 대해 발표한 데 대해 임 교수는 “중국 외교부가 승인한 최초의 외국인 위인 기념관이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며 “신라와 당의 관계를 상상할 수 있는 역사 공간으로서, 양국의 우호와 교류의 주춧돌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고 밝혔다. 마크 피터슨 브리검영대학교 교수가 ‘최치원과 유교’를 주제로 발표한 데 대해서는 “유교는 한국문화의 열쇠라는 인식 아래, 조선시대의 편협한 유교관과 달리 확장된 유교관을 가진 최치원을 주목한 시각이 뚜렷하다”고 평했다. 또한 임 교수는 “시조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2월7일을 세계 시조의 날로 제정하고, 미국 교과서의 가야사 왜곡을 바로잡는 등 한국학자로서 그의 활동도 높이 평가된다”고 덧붙였다. 신양 양주최치원기념관 학예사가 최치원의 양주 시절과 문화 교류를 상상하며 발표한 내용에 대해서는, 임 교수는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탁본과 당나라 토용, 고려청자 등 전시물 구성을 통해 양주가 문명의 나루터였음을 보여준 점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최용춘 상지대학교 명예교수가 고운 사상의 현대적 함의를 ‘동인의식’과 ‘동문의식’으로 정리한 발표에 대해서는 “한국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동인의식과 문화 세계화를 지향한 동문의식은 오늘날 K-컬쳐와도 맞닿아 있다”며 “고운을 선각자이자 세계문화의 선두 주자로 본 착상이 인상 깊다”고 평했다. 임종찬 교수는 총평을 마무리하며 “고운 최치원은 고대의 인물이지만, 현대의 문화 흐름과도 맞닿아 있는 인물로 다시 조명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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