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중순, 전국에 눈이 내렸습니다. 이 시기에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린 적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벚꽃 위에 수북이 쌓인 눈, 그 자체는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눈송이와 꽃송이가 어우러진 풍경은 현실이라기보다는 만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눈 쌓인 벚나무 아래 서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동화의 한 페이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도로 양옆으로 흐드러진 벚꽃길에 하얀 솜이불처럼 내려앉은 눈을 보며 사람들은 신기해했지요.하지만 ‘지금 사과꽃이 다 피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막 싹을 틔운 어린잎들, 이제 막 봉오리를 맺기 시작한 사과꽃 위에 눈이 내려앉았을 때, 사과밭 농부는 아마 가슴 속에서 돌이 하나 자라나는 걸 느꼈을 겁니다. 사람들에게는 ‘이색 풍경’으로 보이는 그 순간이, 사과 농부에게는 한 해 농사를 망칠 수 있는 두려운 순간이었을 것입니다.사과꽃 위에 내린 눈꽃을 아름답기만 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비상계엄사태로 빚어진 작금의 정치 현실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이와도 같을지 모릅니다. 눈꽃의 눈부심에 마음을 빼앗긴 사이, 그 아래 얼어붙은 생명의 떨림은 보이지 않으니까요. 사과꽃 위의 눈처럼 두려운 시간은 헌법재판소의 선고로 지나간 것 같지만, 그 여파와 후유증은 언제 우리 가슴에 돌이 되어 자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이상기후’라는 단어는 이제 뉴스에서만 들리는 낱말이 아닙니다. 사과나무가 계절을 헷갈리고, 꽃은 피자마자 얼어붙으며, 비가 내려야 할 때 눈이 내리는 이 현실 앞에서, 농부는 더 이상 하늘을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벚꽃놀이는 하루이지만, 사과는 일 년을 준비해야 맺히는 열매입니다. 하루의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웠다 한들, 하루의 기상이 한 해 농사를 망쳐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농부의 삶은 늘 자연과 함께였지만, 이제는 자연과 싸우는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싸움은 이제, 봄에도 눈을 대비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결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눈앞에 닥친 현실입니다.귀감 농장의 감나무 과수원에도 새벽 눈이 내렸습니다. 다행히 이곳은 그렇게 많이 내리지 않았고, 눈도 빨리 녹아버렸기 때문에 감나무 새순은 무사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은 어떨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부디 전국의 모든 감나무들이 이번 눈에 냉해를 입지 않았기를 바랍니다.곶감을 만드는 나는, 우리 과수원의 감나무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감나무 작황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얼마 전, 산청 고종시 주산지에서 대형 산불이 열흘 이상 이어졌을 때, 감나무들도 피해를 입게 될까 봐 마음을 졸였습니다.이제 더 이상 농사는 ‘계절에 맡기면 되는’ 일이 아닙니다. 봄이 겨울을 닮고, 여름이 봄을 빼앗아 가며, 가을은 제 색을 다 채우기 전에 얼어붙습니다. 농부는 날씨를 예측하고, 가능한 모든 변수에 대비하려 애쓰고 있습니다.하지만 농사는 결국 자연을 향한 겸손의 결정체이고, 불확실한 내일에 건네는 조용한 희망입니다. 자연이 내민 손을 붙잡는 일이 아니라, 언제 놓을지 모르는 손을 그래도 믿고 함께 걸어가는 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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