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문태서와 함께 싸운 사람들은 대부분 무주, 장수, 진안, 함양, 거창, 김천 등 덕유산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 출신들이다. 문태서는 어느 정도의 의병이 모여들자 구체적인 의진을 조직하였으며, 주요 직책을 각자에게 부여하였다. 이들에게는 독립된 소규모 의병부대를 운영하게 하였으며, 대규모 전투나 필요시에는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문태서와 함께 한 주요 의병장들의 기록을 살펴보고, 의병활동에 참여한 민간인들의 자료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아쉬운 점은 6.25전쟁으로 인해 경상도 지역의 재판기록이 소실되어 경상도 지역 출신 의병들의 재판기록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1. 문태서를 도운 주요 의병장들문태서는 자신의 의병진을 호남의병이라 칭하고 스스로 호남의병장이 되었다. 그 진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大 將 文泰瑞秘 書 朴守文2)先鋒將 朴春實3)中軍將 金誠輔4)後軍將 申託光5)이들에 대한 기록은 판결문, 독립유공자공훈록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기록을 살펴보면서 아쉬웠던 점은 비서 박수문에 대한 자료이다. 일제가 문태서 의병부대 관련자들을 재판하여 남긴 자료에는 문태서의 비서에 해당하는 도선봉 박동식(朴東植) 판결문이 있다. 이 내용을 근거로 하여 박수문은 박동식의 다른 이름이라고 판단하였다. 박동식은 의병활동 주요 지도자로 교수형에 처해져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않고 있다. 문태서 의병부대의 주요 지도자들의 공훈록 내용에는 상당한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그러한 사항을 따지지 않을 것이다. 그 까닭은 본 연구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다만 그대로 옮겨 적을 뿐이다. 주요 지도자 명단에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핵심 간부였으며, 무주군 무풍지역 책임자였던 이장춘에 대한 기록도 같이 소개하고자 한다. 1) 박수문(이명 박동식朴東植) 판결문6)전라북도 용담군 이동면(二東面) 백암리(白岩里)농업 박동식(朴東植) 43세위의 내란(內亂)·고살(故殺)·방화(放火) 사건에 대한 융희 3년 6월 4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유죄(有罪) 선고한 판결에 대하여 피고 공소(控訴)를 신제(申提)하였기에 본원(本院)에서 검사 대촌(大村大代)의 입회 심리를 거쳐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주문 : 원(原) 판결은 취소하고 피고를 교(絞)에 처한다. 압수한 물품 중, 총·군도(軍刀)·탄약(彈藥)·화승(火繩)·인명서(人名書)는 이를 몰입(沒入)하고 기타는 차출인에게 환부함이 당연할 것이다.이유제1. 피고는 폭도 수괴 문태서(文泰西)라는 자가 정사(政事)를 변경할 목적으로 난(亂)을 일으키려는 실정을 알고, 융희 원년 12월 30일에 그 부하로 가담하여 이른바 도선봉(都先鋒)이 되어 피고는 군도(軍刀)를 휴대하고, 담총(擔銃)한 부하 약 40명을 지휘하여 의사(意思)를 계속하여 융희 2년 3월 14일(음력 2월 12일)에, 경상북도 안의군 서상면(西上面) 영각사(靈覺寺)에서, 동년 4월 10일(음력 3월 10일)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溪北面) 어전(於田)에서, 동년 5월 26일(음력 4월 26일)에 전라북도 무주군(茂朱郡) 구천사(九泉寺)에서, 동년 6월 24일(음력 5월 26일)에 전라북도 무주군(茂朱郡) 도현리(道峴里)에서, 동년 7월 22일(음력 6월 24일)에 전라북도 용담군(龍潭郡) 지장산(地藏山)에서, 동년 11월 27일(음력 11월 4일)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富南面) 고청동(高淸洞)에서, 융희 3년 2월 10일(음력 정월 20일)에 경상남도 안의군(安義郡) 갈현리(葛峴里)에서, 동년 3월 10일(음력 2월 19일)에 경상남도 안의군(安義郡) 서상면(西上面) 조산리(鳥山里)에서 수비대(守備隊)와 교전하여 내란의 행위를 일으켰다.제2. 피고는 전기(前記)의 횡행 중, 융희 2년 1월 일자미상에 부하 성명미상의 모(某) 외 13명이 수괴의 명을 따르지 아니하고 민재(民財)를 약탈하였다 하여 수괴 문태서와 협의하고 함께 조의(造意)하여 그 부하를 명하여 그 중 9명은 전라북도 금산·용담, 충청북도 금산, 충청북도 황간(黃澗)·영동(永同) 등 각 지방에서 총 및 칼로써 살해하였던 것이다.제3. 피고는 전기(前記) 횡행 중, 경상남도 안의군 갈현리(葛峴里)에 숙박할 때에 동리민(同里民)이 피고 등의 동정을 일본군대에게 밀고한 일을 분히 여겨 융희 3년 2월 23일(음력 2월 4일)에 그 부하를 지휘하여 동리(同里) 거주 성명미상의 모가(某家)를 불태운 것을 계획하고 그 집에 방화(放火)하여 그 집을 불태우고, 또 2호를 연소(延燒)시켰던 것이다.위의 사실은 전안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에서의 피고의 신문조서, 원심(原審) 심문조서, 피고의 본 공판정에서의 공술에 의거하여 피고의 범죄 증거 충분하다 하겠다.이상을 법률에 조람하건대, 피고의 제1 소위는 형법대전(刑法大全) 제195조에 해당하니 종범(從犯)에 관련되므로 동법 제79조, 제135조에 의하여 1등을 감하여 유형 종신(流刑終身)에 처할 만하고, 제2 각 소위는 동법 제473조에, 제3의 소위는 동법 제666조에 해당하는 바 2죄 이상 구발(二罪以上俱發)이므로 동법 제129조를 적용하여 제2 소위 중 성명미상의 모(某) 1명을 살해한 죄에 따라서 피고를 교(絞)에 처함이 당연할 것이다.압수 물품 중, 총·군도(軍刀)·탄약(彈藥)·화승(火繩)은 범죄용에 관련된 응금물(應禁物)이며 인명서(人名書)는 범죄용에 관련된 물건이며, 또 피고 소유 이므로 동법 제118조에 의하여 관(官)에 몰입(沒入) 할 것이며, 기타는 몰입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각각 차출인(差出人)에게 환부함이 당연할 것이다.2) 의병장 박춘실 공훈록7)관은 밀양(密陽)이고 전라북도 장수(長水)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불의를 모르는 곧은 성품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무주(茂朱)·장수·진안(鎭安)·용담(龍潭) 등지에 국가존망의 이때 모두 분발하여 사심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배부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격문을 보고 모여든 의병 52명을 이끌고 용담 구봉산(九峰山)에서 일군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6년 가을 문태서(文泰瑞;泰秀) 의진과 연합하여 장수 및 무주 일대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7년 무주 상창곡(商昌谷)에서 적과 교전하여 다시 전과를 올렸다. 1908년에는 무주 구천동에서 일군 헌병대와 교전하는 등 1909년 3월까지 5년 동안에 걸쳐 진안(鎭安) 천반산(天盤山), 성수산(聖壽山), 장수 덕유산(德裕山), 구천동 적상산(赤裳山), 토옥동(土沃洞) 문성어전(文城於田), 농수리(農水里), 양악(陽岳), 진도리(眞道里) 등지에서 60여 차례 교전하였다. 김성범(金聖凡)·문태서를 부장(部將)으로 하여 200∼700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경북과 전북을 무대로 하여 일병 30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 400여 정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1909년 5월 6일 함양 수비대장 조사(鳥飼) 대위가 이끄는 토벌대 30명이 장계(長溪) 등지로 출동하였다. 8일 오후 박춘실은 130명의 동지와 더불어 유진하고 있던 문성(文城) 동북쪽에 떨어진 산중에 이르러, 이곳에서 적군과 교전하던 중 의병 13명이 순국하고 박춘실은 체포되었다. 1909년 7월 17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14년 전주형무소를 탈옥하려다 실패하였다. 그후 대구 형무소로 이감되자 벽을 파괴하고 동지 100여명을 탈옥시킨 후 본인은 자진순사(自盡殉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3) 전성범 공훈록8)경상남도 함양(咸陽) 출신이다. 1906년 5월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덕유산(德裕山)에서 의병의 기치를 드높일 때 중군장으로서 활약하였다고 한다. 1907년 7월 경남 거창(居昌) 일대에서 거의, 의병장이 되어 안의(安義)에서 왜적과 접전을 벌였으나 의병 50명이 전사하고 20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패를 겪었다. 그후 진주(晋州) 의병장 유종환(兪宗煥)과 합진하여 용담(龍潭)·금산(錦山)·영동(永同) 등지에서 왜적과 교전하였다. 1909년 2월 안의에서 그리고 4월에 거창에서 적과 격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으나, 1911년 1월 양악(陽岳, 현 전북 장수군 계북면)에서 적과 교전 중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 틈을 엿보아 일차 탈출할 수 있었으나 다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던 끝에 1911년 4월 5일(음력 1911. 3. 7) 사형 순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4) 신탁광 공훈록9)
전라북도 무주(茂朱) 출신이다.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어서 구한국군이 해산되자, 거의할 것을 결의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문금서(文今西)와 함께 부하 150명을 거느리고 무주와 경상남도 안의(安義)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11월 30일경 황덕화(黃德化)·황이만(黃二萬) 등 부하 8∼9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전라북도 금산군에 사는 음대보(陰大甫)와 김내삼(金來三)의 집에 들어가 의병운동을 위한 군자금으로 금 23냥을 모금하였다. 1908년 4월 10일 문태서와 함께 장수(長水)읍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마침 주재소의 일경들은 모두 의병 토벌작전에 동원되어 나가고 한인순사 1명만 있을 따름이었다. 따라서 별다른 저항 없이 주재소의 기물을 취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학교·군청 등의 부속물의 건물, 그리고 일인가옥 13동을 불태우고 유유히 무주 쪽으로 퇴거하였다. 그러나 토벌대의 추격을 받아 무주의 칠연계곡(七淵溪谷)에서 유진(留陣)중 일군의 기습을 받아 의병 100여명이 모두 이곳에서 옥쇄하였다. 1975년 지방민들은 이 의로운 유해를 모아 묘소를 정화하고 7연백의총(七淵百義塚)이라 명명하였다. 신명선이 순국한 후 그의 아우가 계속 의진을 이끌고 활약하였다. 즉 1908년 4월말에 장수 읍을 습격하여 많은 전과를 남긴 것 등이 그 아우의 활약상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5) 이장춘(이명 : 이병열 李秉烈) 공훈록10)
- 전라북도 무주 무주군 무풍면철목리849전라북도 무주(茂朱) 출신이다. 1907년 10월경 덕유산(德裕山)을 근거지로 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의병대장이 되어 동지 이백여 명을 거느리고 무주·함양(咸陽)·안의(安義)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때 무주 주재소와 장수읍(長水邑) 등을 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9년 1월 안의군 북쪽으로 이전하여 5월에 남원군 이문성(南原郡 里文城) 동북방면에서 일본 헌병들과 교전 끝에 이를 격파시켰다. 이해 8월에 영남지구의 의병대장 문태서(文泰瑞)와 함께 충청북도 영동(永同)·옥천(沃川) 등지로 이동하여 활약하였으며, 10월에는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하여 일본 헌병 3명을 납치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였다. 1910년 4월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茂豊面 縣內里) 거문돌 부락에서 일본 헌병과 교전하던 중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신편 한국사 국권회복운동 43 Ⅳ. 항일의병전쟁 3. 정미의병2) 중부지역의 의병전황 (3) 의병장들의 의병활동 나. 호남의병-전북 (다)문태수2) 의진 구성 중 비서 박수문은 관련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의병 재판기록에서 문태서 도선봉으로 활동한 박동식의 존재는 있다. 도선봉은 비서에 해당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박수문은 박동식의 이명으로 해석함이 타당하다.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의병편Ⅶ (二)五月, 全羅道. 高秘收 第五四九號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의병편Ⅶ (一) 四月, 全羅道 100. 高秘收第四四五號 신편한국사에서 적고 있는 중군장 김성보는 전성범의 한자 오기(金誠輔은 全誠範으로 오기할 수 있음)로서 전성범의 한글 및 한자 이명은 각종 기록에 여러가지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 자료에서는 문태서의 부장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직함은 보이지 않는다.5) 여러 가지 관련 자료에서 신탁광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신명선이 문태서 부대에 합류하여 부장으로서 중요하게 활동한 기록이 있다. 따라서 실존 신명선을신탁광으로 해석함이 타당하다.6)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 의병항쟁재판기록 검색어 ‘박동식’7) 독립유공자공적정보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2468) 독립유공자공적정보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7759) 독립유공자공적정보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274810) 독립유공자공적정보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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