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하늘만 바라보다 한숨 짓고 고개 떨 군 하루, 이럴 때는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 재인가를 절감합니다. 평소엔 내 의지로 세상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자연 앞에선 그저 무력한 존재가 됩니다. 며칠 전부터 비 소식이 있었기에 마음 한 켠에 기대를 품었지만, 오늘 하늘은 끝내 외면 했습니다. 불타는 산과 집을 지켜줄 비는 오지 않고, 이재민들의 눈물이 비처럼 떨 어졌습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이웃 동네 산청 시천에서 시작된 불길이 여덟째 날에도 꺼 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제는 산청에서 남 풍을 타고 넘어온 연기가 함양 전역을 자욱 하게 뒤덮었습니다. 매캐한 불 냄새를 맡 고 보니 설마 여기는 괜찮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이 사라지고 불안이 슬그머니 밀려왔 습니다. 용유담 세동마을 사람들은 이미 짐을 다 꾸려놓았다는 풍문에, 우리도 보따리 몇 개 꾸려 차에 실어놓았습니다. 와중에 아내는 개 목걸이 두 개와 고양이 이동장 두 개도 챙겼습니다. (수리야~ 모시야~ 여행은 첨이지? 사랑아~오디야~ 이리와~ 같이 거래 처에 좀 다녀와야겠다.) 하지만 가장 큰 고 민은 곶감입니다. 냉동창고 네 개에 곶감이 가득 있습니다. 트럭 한 대로 다 실을 수 없 는 많은 양입니다. 불이 지리산을 넘어 함양 까지 올지, 중간에 진화가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망설여집 니다. 곶감 하나하나에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깃들어 있습니다. 만약 그 소중한 결실이 불에 사라진다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철 렁 내려앉습니다. 재난은 항상 예고없이 닥쳐옵니다. 우리 집과 덕장은 지리산 아래 첫 집이라, 산불이 넘어오면 제일 먼저 불을 맞이하게 됩니다. 연기를 몰고 온 남풍이 하루에도 수십 번 내 마음과 판단을 흔들어 놓습 니다. 곶감을 안전한 전라도 어디 쯤에 냉동창 고를 수소문해서 미리 옮길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거리와 시간, 여력을 생각하면 당장 실행에 옮기기엔 쉽지 않 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의성에서 발화되 어 안동, 청송, 영덕 바닷가까지 순식간에 번진 괴물같은 산불을 떠올리면 늦기 전 에 움직이는 게 정답처럼 느껴지기도 합니 다. 사과 산지인 청송 등 경북 사과 농가의 창고가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들으니 곶감 창고가 그렇게 타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재난 앞에서 농부는 지극히 현실적인 철 학자가 됩니다. 지키는 것과 버리는 것, 오늘과 내일, 비용과 생존 사이에서 본질 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무엇을 위 해,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가?”라는 물음 입니다. 지금 나는 산불로부터 삶을 지키기 위한 결정 앞에 서 있지만, 어쩌면 이 불길은 내 안에 있는 어떤 오래된 망설임이나 두려움 을 태우러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위 기란 단지 물리적인 사건이 아니라 사람 마 음 깊은 곳을 흔드는 힘이기도 하니까요. 불 이 꺼지길 기도합니다. 하지만 기도만 하진 않겠습니다. 준비하고, 움직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뒤에 그때 기도하겠습 니다. 농부는 늘 그래왔습니다.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맨 뒤에야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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