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이스/근대사 연표 기록에 나타난 위 전투는 다음과 같다. 05. 08. 의병장 文泰西. 朴忠實(박춘실 오기) 등 100여명이 溪北面 德裕山頂에서 토벌대와 약 30시간 교전, 의병 13명 전사.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4 p. 395 의병 수백명, 전북 文城(현 전북 장수군 계북면 어전리 문성)동북 약20리서 교전. 독립운동사 I. 의병항쟁 병 의약 130명이 전북 長溪場 東北 德裕山頂에서 咸陽守備隊와 교전. 의병 13명 전사.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4 p. 491 朴春實 의병부대 약130명, 경남(전북 오기) 長溪 동북 약20리서 교전. 독립운동사 I. 의병항쟁이 전투는 문태서 의병부대 선봉장인 박춘실부대가 일본군 토벌대와 벌인 대규모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 13명이 전사하고, 박춘실의병장과 부하 9명이 체포되었다.1)2) 이처럼 풍부한 사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왜곡하여 기록한 것은 항간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를 사료화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문태서가 지휘하는 의병들은 대부분 해당지역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었으므로,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농사철에는 의병을 동원하지 않았다. 근대사연표에 따르면 5월 중순부터 10월 하순까지는 대규모 전투가 없었으며,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독립된 부대에서 단독으로 벌인 소규모전투로서 지역내 친일파 처단, 자금모금 등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이 문구는 백성들을 고려하는 문태서장군의 부대운영방침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정되어야 한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이 전투는 매우 의미깊은 전투로서 이렇게 간단한 문장으로 처리해서는 안된다. 홍영기는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399쪽에서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벌인 ‘남한폭도대토벌작전’기간이 1909년 9월1일~10월10일(총 40일- 제1기: 15일간(9월 1일-15일), 제2기: 15일간(9월 16일-30일), 제3기: 10일간(10월 1일-10일)) 추가 10. 25일까지 연장 (총 55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본은 자체 보고서를 통해 남한의 의병을 완전히 토벌하였다고 적었다. 그런데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오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사살당했으며, 10월 29일에는 문태서 의병부대가 충북 옥천군 이원역을 습격하여 완전히 소각되었다. 두 사건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 일본은 경부선의 안전을 확신하지 못하고 일본군 사령관 大久保 대장의 일본 귀국을 중지하고 3), 문태서 의병부대를 진압할 특별 대책을 세우게 된다. ‘安應七 제5차 진술내용’ 중에서 일본검사는 안중근을 심문하면서 문태서를 아느냐고 물었다.4) 그 까닭은 이토오 히로부미 사살과 이원역 습격 사건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들이 추가되어야만 제대로 기술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문태서 부대는 동년 10월 26일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한 3일 후인 10월 29일에 경부선 이원역을 습격하여 완전히 소각하였다. 이 사건은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경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으며, 만주로 진출하기 위한 철도망 안전을 위해 문태서부대 토벌계획을 별도로 세우게 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11월에 들어서는 일본군경과 벌인 전투활동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문태서를 체포하기 위해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6권 의병편Ⅸ (一) 一一월, 忠淸道 造 報伊院驛에 暴徒來襲의 件 詳報 (天安憲兵分隊 大田分遣所長 報告)외 많은 문건들이 생산되었으며, 다양한 작전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근대사연표에서 이 시기에는 문태서부대가 활동하고 있는 지역에서 의병이 30명 이상 참가하는 대규모 전투는 없다. ‘폭도에 관한 편책’에서도 이러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위 문구는 당연히 수정되어야 한다.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안중근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토오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사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63년에 포상한 문태서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이렇게 기록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이원역 습격 이후 일본은 한국주차군 사령관이 일본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군사훈련에 참석하는 것도 미루고 문태서를 잡기 위한 대토벌대작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이러한 작전을 전개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일본이 만여 명을 배치할 정도로 작전계획이 방대하였다면 일본이나 대한제국의 공식 기록이 있어야만 하는데 관련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다만 지역 향토지나, 집안 기록으로 전해올 뿐이다. ‘남한폭도대토벌작전’으로 경남, 전북, 충청 지역의 의병들이 궤멸된 상태에서, 그리고 ‘1909년 벌인 이원역 습격’으로 인해 일본군경들이 문태서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대군을 거느리고 서울진격작전을 펼칠 수 있는가? 실로 황당무계한 이야기이며 그야말로 낭설일 뿐이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는 뜻이기도 하다. 이 문구의 배경은 1907년 12월 문태서가 포수로 짐작되는 1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서울로 가다가 되돌아온 사건일 것이다. 문구 전체를 살펴보면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당연히 사실에 근거해서 수정되어야 한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문태서의 최후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문서나 신뢰할 수 있는 자료들조차도 일치하지 않는다. 체포 당시의 상황도 지극히 극적인 요소가 가미된 문구가 대부분이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일본이 기록하고 있는 각종 문서 어디에서도 문태서를 체포하였다는 기록은 없으며, 각종 기록들이 인용하고 있는 유일한 자료는 경남일보 기사이다. 기사에 따르면 ‘서상면장이 문태서를 포박하여 안의군 헌병분견소에 송치하였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당시 진주에 본사를 두고 있던 경남신문이 안의에 와서 사실을 확인했을리 만무하다. 일본군측이 제공하는 정보나, 지역에서 흘러다니는 소문을 받아서 싣는 정도였을 것이다. 덕유산 주변의 의병부대를 통솔하고 있던 문태서가 그렇게 쉽게 잡힐 인물이 절대 아니다. 문태서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자세하게 적어놓은 문건이 있다. 매우 중요 한 내용이므로 직접 인용하고자 한다. (중략) 또 문태서의 件에 대해 탐지한 바 좌와 같다. 一. 그가 어느 일지에 숙박하자 다른의 동민을 요소에 감시시켜 두고 심야 일 이의 부하를 인솔하고 타동에 가서 숙박하여 일신의 안전을 도하므로써 헌병수비대 등이 와서 습격하여도 그의 출발 후로서 공허하므로 동민은 문태서를 신과 같이 경신하였다. 二. 또 토벌대가 문태서를 습격하여 그 지에 이르자 그는 우리대에게 그의 면식 있는 자 없기를 다행으로 스스로 진하여 토벌대의 앞에 나와 어디까지나 동민을 가정하고 군대숙영을 위하여 급식에 필요한 노를 집행하고 평온히 대의 동정을 살피며 두어 직시 부하를 전도에 잠복시켜 토벌대를 저격하고 혹은 행동을 방해한 일이 속속하다고 한다. 전라도 무주 지방의 일부락민은 그를 신과 같이 신뢰하고 부녀는 조로부터 밥을 궤에 옮길 때 초미를 공하여 문태서의 성공을 기원하고 있다고 한다. 三. 문태서가 횡행한 무주 지방으로부터 온 한국인의 말에 의하면 그가 항상 횡행한 지역은 삼도봉과 덕유산의 간이라 한다. 문태서의 신중함과 안전도모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위 기록과 같이 문태서는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해 매우 신중하고 치밀하게 행동하고 있으며, 상황에 맞게 잘 대처하여 일본군경을 공격하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이 신과 같이 모시고 있었다. 따라서 문태서가 그의 고향인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서 지인과 만나던 중 체포되었다는 말을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다. 일본군경조차도 적괴 문태서(賊魁 문태서)로 표현할 정도로 유명한 의병 지도자를 체포한 사실을 일본측 기록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 까닭을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첫째, 문태서가 체포되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거나, 둘째 문태서 체포 사실이 극비에 붙여져야만 했을 경우이다. 하지만 후자일 경우 일본측이 기록한 최소한의 심문조서는 존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문태서보다 훨씬 중요도가 낮은 의병 중간급 간부도 체포하여 심문한 조서가 많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항쟁을 포기하지 않은 소수 의병 진압에 대해서도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일본군경들이 문태서를 체포하였다면 보고를 받지 않을 리 없으며,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리 없다. 의문이 남는 또 한 가지는 문태서를 체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상해치사죄로 기소되어 대구복심법원 상고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는 점이다. 문태서를 체포하는 데 앞장서겠다는 약속만으로 교수형에서 면소 판결을 받은 한봉수 판결문을 보면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폭도 수괴를 체포하여 헌병대에 넘겼는데 무슨 까닭으로 상해치사죄로 기소되었을까? 그것도 현직 면장이 직접 체포하여 헌병대에 넘겼다면 당연히 포상감이지 않는가? 따라서 이 부분은 세밀하게 검증되어야만 하는 부분이다. 문태서를 체포했다고 주장하는 자는 이전에도 의병을 체포하여 일본헌병대에 넘긴 적이 있는 의병사냥꾼이다. 이러한 자를 헌병대에서 기소하여 재판에 넘긴 까닭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문태서의 마지막을 이렇게 처리하고자 하는 일본군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았나 하는 판단은 당연하다. 문태서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군경이 어떻게 기록을 남기지 않았단 말인가? 따라서 우리는 일본과 한국 모든 공식 기록에서 문태서의 자살, 사형, 사살, 체포 등의 기록을 찾아야만 하고 반드시 사실을 밝혀내야만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문태서는 건국훈장 대통령장(2급)을 추서받았다. 하지만 절대 합당한 대우가 아니다. 문태서는 단순한 의병장이 아니라 덕유산 일대를 통솔하는 사령관이었다. 각종 기록 어디에서도 문태서가 전투에 직접 나섰다는 문구는 없다. 다만 문태서부대로 통칭하고 있다. 이는 작전을 수립하여 일본군경과 정규전을 벌였다는 뜻이다. 따라서 공훈 승격(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위해 독립유공자 재심사가 필요하며, 우리는 근거자료를 발굴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1)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4권 의병편Ⅶ (二)五月, 全羅道 暴徒의 件2)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4권 의병편Ⅶ (二)五月, 全國 通報3) 대한민보, 1909.11.2. 「사령관귀국중지」4) 統監府文書 7권 一. 安重根關聯一件書類 (哈爾賓事件書類 一∼六, 伊藤 公遭難事件書類 一~四, 安重根及合邦關係事類 一~三,하얼빈事件憲兵隊報告一~三 (287)5) 국가보훈처/공훈전자사료관/독립유공자공훈로/문태수 독립유공자공훈록6) 대한매일신보, 1909.11.02. 「대토벌 한다네」7) 慶南日報,1911. 10. 27. 「문태서 체포」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7 의병편Ⅹ (一) 一月, 慶尙道 「賊魁 文泰洙와 其 部將 申蘭波의 行動」9)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7 의병편Ⅹ (二) 二月, 忠淸道 「賊魁 文泰西에 對한 檢擧計劃에 關한 件」10) 1910-10-월중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9권 의병편XII 「賊情 通報」11)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 의병항쟁재판기록 /충청남·북도 「한봉수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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