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1. 1907년 1월에 함양군 안의 출신 의병장 노응규가 체포되어 4월에 순국하는 시기이다.1) 이 시기에 덕유산 인근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 기록을 확인할 수 없으며, 동년 8월 28일에서야 옥천지역에서 의병 60명이 일본인들을 습격하여 2명을 살해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2) 2. 9월 하순 무주읍 습격을 통해 총기 40여 정을 획득하고, 다시 이듬해 1월에 부남면 고창곡 전투에서 총기 50여 정을 획득하였다면 문태서 부대는 일본군 신식 총 90여 정을 획득하여 사용하고 있는 최강의 의병 부대가 되었을 것이다. 문태서 체포를 위한 정보수집문서에서는 ‘賊徒의 무기는 엽총 1, 봉총 1, 도검 3, 기타는 화승총 같이 보였다고 신이 말하였다.’3) 3.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은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 출신으로 본명이 이장춘임이 분명하며, 독립유공자 공훈록 ‘이병열’을 검색하면 ‘본명 이장춘’이며 이명이 ‘이병열’이다. 문태서 의병 부대가 1910년 4월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茂豊面縣內里) 거문돌 부락에서 일본 헌병과 교전하던 중 전사 순국하였다.4)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다. 각 종 기록에 이병열 혹은 이장춘이 총기 제작과 관련된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이장춘이 100명 규모의 소부대를 운영하는 의병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공식 문건이 7건이나 된다. 문태서 부대에서 총기를 수리하고 화약을 제조했던 죄목으로 처벌받은 의병은 이용이, 명경안이다.5) 아무리 기록이 부실하다 하여도 고창곡 전투와 같은 큰 전투는 최소한 황성신문에 반드시 실려야 할 전투였다. 이보다 못한 전투도 각종 연표와 신문, 보고서 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럴게 큰 전투가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실제 전투가 없었거나, 아니면 깊은 산중에서 일어난 일이어서 기록되지 않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필자는 전자가 옳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장수읍 전투와 고창곡 전투에서 80정 이상의 총기를 노획한 문태서 부대인데, 밀정이 보고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의병 대장 문태서를 호위하는 부대로서는 실로 빈약한 무장 상태이다. 획득한 총은 총알이 없어서 사용하지 못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당시 의병 부대 안에는 총알을 제작하는 사람들 이 있었다. 따라서 위 전투 기록은 실제 벌어진 것이 아니라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라 판단된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 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 창의 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 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의병들의 서울 진격을 위하여 당시 각도의 의병장들은 연합 의진의 결성에 진력한 이인영을 13도 창의 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문태서도 전라 유진소(전라 도) 전라 창의 대장에 추대되었다. 전국의 의병 조직을 포괄한 형태로 연합 의진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13도 창의 대진소의 연합 의병 편제를 개편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1908년 1월경 이인영 등 지도부는 의진을 재정비하였다. 호남 창의 대장 문태서가 빠지고, 교남 창의 대장 신돌석이 박정빈으로 교체된다.6) 문태서가 어떤 실적과 근거 및 경로를 바탕으로 1차 조직에서 호남 창의 대장으로 추대 받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문건을 현재로서는 찾을 수가 없다. 실제 1906년 하반기부터 1907년 하반기까지 호남 지역에서 활발하게 의병 부대를 이끌고 있었던 의병 대장은 1906년 4월부터 민종식 부대에 합류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민종식 체포 이후 전북과 충청도를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던 김동신과 이석용이었다.7) 그리고 왜 13도 창의 대진소 지휘부 재편 시 신돌석과 문태서가 빠졌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의병 서울 진격을 위한 1차 조직에서 호남 창의 대장에 문태서가 추대되었고, 몇 가지 기록에서 문태서는 약 100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서울로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유에서인지 양주에 도착하지 않았거나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신돌석과 문태서는 2차 조직에서 배제되었다. 많은 기록들이 ‘서울 진공 작전 실패는 양반 유생 의병장들의 한계를 보여 줬다.’라고 적고 있다.8) 이들은 유인석-김백선 사건9)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낡은 신분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창의군의 지휘부를 장악한 양반 유생 의병장들은 함께 서울로 진공하려 한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과 함경도에서 맹활약하던 포수 출신 홍범도 같은 평민 출신 의병장을 신분을 문제 삼아 제외했다. 문태서도 이러한 원인으로 배제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10) (統監府 文書 8권 一. 李麟榮 陳述 調書 (2) 暴徒 巨魁 李麟榮 調書 보고 건 - 이인영 답변 문) 文泰洙는 어떤가?   답 이름은 들었습니다만 만난 적은 없습니다. 문 유생인가? 답 학문은 있지만 유생은 아닙니다. 문 학문이 있고 유생이 아닌 것은 어떤 점에 구별이 있는가? 답 진짜 유생은 孔孟의 가르침을 받고 이를 지키려는 자를 말합니다.   이 문답에서 알 수 있듯이 이인영은 문태서를 유생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학문이 있는 평민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러한 편견이 문태서에게 전달되었다면 회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위 문구는 당연히 수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문태서가 의병 100명을 이끌고 출발했으나 양주에 도착하지 않은 까닭, 이인영의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한 까닭이 당연히 공훈록에 들어가야만 문태서의 회군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막연하게 미화만 해서 될 문제는 아니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 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1908년에 문태서 의병 부대가 벌인 전투는 정규전에 버금가는 대규모 전투였다. 전투 횟수도 많으며, 매우 조직적으로 전투가 이루어졌다.11) 문태서는 덕유산- 민주지산-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에서 여러 지역을 나누어서 지역별 의병 부대를 독립적으로 구성하여 각 자 전투를 벌이도록 하였으나, 전투의 기본 원칙을 정했던 것 같다. 농번기에는 절대로 전투를 벌이지 않으며, 30명 이하로는 헌병 분견대나 경찰 주재소 병력과 전투하지 않도록 하였고, 연합 토벌대가 구성되면 의병들도 100명 이상의 대규모 연합 부대가 편성되어 대응하였다. 근대사 연표에 이러한 원칙을 추정할 수 있는 많은 자료가 있다.12)   문태서가 일본군경에 체포되었다가 탈출하였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다만 1910년 6월에 문태서 부대 중군장이었던 전성범이 체포된다.13) 그리고 사실을 확인할 수 없으나 대구 감옥에서 탈출하였으나 다시 체포되어 사형당했다는 공훈록에서 이 문구와의 연결선을 약간 찾을 수 있다.14)   따라서 문태서 부대의 전투 상황을 이렇게 초라하게 기술하는 것은 문태서를 욕보이는 것이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질렀다.   1908년 1월부터 5월 중순까지 농한기 기간 동안 문태서 부대가 벌인 전투는 매우 많으며, 규모도 크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적어 놓은 것은 역사적 사료 발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4월에 이루어진 장수읍 전투는 근대사 연표에 의하면 4월 9일에 벌어졌으며, 덕유산 부근의 일본 병력이 연합 토벌대를 구성하여 의병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장수읍이 비어 있음 을 알고 의병들이 공격한 전투이다.   따라서 추가적인 사료 발굴을 통해 보다 상세하게 기록할 필요가 있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 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위 문구들을 증명해 줄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들이 없으며, 오히려 이것보다 더 큰 규모의 전투가 많이 있었으며, 근거 자료도 풍부하다. 따라서 전투 기록은 새롭게 작성되어야 한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 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1908년 4월에 무주군 안성면 갈마리(현 죽천 리)에 문태서 송덕비가 세워지고 이를 경찰이 발견하여 제거하였다.16)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발신자: 全羅北道 觀察使 李斗璜 수신자: 內務大臣 朴齊純 管內 錦山·南原 兩 警察署長의 暴徒에 關한 報告 要旨는 左와 如하다. 一. 茂朱郡 安城 一安面 竹場里 及 渴馬里에 客年來 出沒한 暴徒 首魁 文泰瑞의 頌德碑를 建設하였음을 發見 直時 取除 其 設立者를 取調한 바 同 地方의 者의 所爲일 것이라고 思惟하나 其 何人인지 分明치 않다. 그리고 其 碑文은 左와 如하다. 竭忠輔國 下濟萬民 爲國義兵大將 文泰瑞 之碑 名振四海 難盡其德 戊申 四月 日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송덕비를 공덕비로 잘못 적고 있으며, 설립 일자 또한 1909년 4월로 오기를 하고 있다. 아울러 송덕비를 세운 까닭도 없이 단순하게 비를 세웠다는 것은 조선 말기 탐관오리조차도 송덕비를 세운 사실에서 보듯 강압에 의해 세워졌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현재 송덕비를 세운 까닭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 자료는 충분하게 확보하고 있다.17) 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대사연표, (1908.) 01. ~ 04.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대사연표, (1907.) 08. 28.3) 統監府文書 6권 一. 憲兵隊機密報告(827) [賊魁 文泰洙의 행동에 과한 慶尙南道 安義分遣所長의 보고] 憲機第二三一二號4)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이병열」5)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 의병항쟁재판기록 /전라남·북도 1 「이용이, 명경안 판결문」6) 한민족독립운동사 1권 국권수호운동Ⅰ-Ⅱ. 국권수호를 위한 군사활동 5. 유생의진의 대일항전 3) 서울 진공작전과 유생 의병장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대사연표, 검색주제 ‘김동신, 이석용’ (1906.) 01. 01 ~ (9107.) 12. 31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2) 4. 의병전쟁의 발전 > 1) 서울진공작전의 실패와 근거지문제 > (1) 13도 의병부대의 서울진공작전9) 독립운동사 2 의병항쟁사 제2편 명성황후 시해와 전기의병 /제4장 정국변동과 의병의 동향10) 統監府文書 8권 一. 李麟榮陳述調書 (2) 暴徒巨魁 李麟榮 調書 보고 건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대사연표, 검색주제 ‘덕유산 주변 각 종 지명’ (1907.) 10.01 ~ (1908.) 12. 311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대사연표, 검색주제 ‘덕유산 주변 각 종 전투’ (1907.) 10.01 ~ (1909.) 12. 3113)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8권 의병편XI (四) 七月, 慶尙道, 「暴徒逮捕의 件」14)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전성범」1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대사연표, 검색주제 ‘덕유산 주변 각 종 전투’ (1907.) 10.01 ~ (1909.) 12. 3116)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 의병편Ⅵ (三) 三月, 全羅道, 폭도 내습의 건1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대사연표, (1909.) 03. 19 등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댓글0
로그인후 이용가능합니다.
0/150
등록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름 *
비밀번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복구할 수 없습니다을 통해
삭제하시겠습니까?
비밀번호 *
  • 추천순
  • 최신순
  • 과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