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경남 안의(安義) 출신이다. 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장구지, 구 경남 안의군 서상면 장구지 둘 중 하나로 표현하여야 한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이 문구는 위인전에 나오는 전형적인 문구로서 용모준수, 학문탁월, 병서통달 등 모든 요소가 들어가 있는 통속적인 문구이다.1. 문태서의 용모와 관련된 일본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적도(賊徒)의 무기는 엽총 1, 봉총(奉銃) 1, 도검(刀劍) 3, 기타는 화승총 같이 보였다고 목격자가 말하였다. 문태수의 인상은 신장이 5척 4촌 정도, 중간키에 살이 알맞게 찌고, 하얀 치아에 눈이 크며, 흰 살결에 콧대가 반듯하고 수염이 적고, 귀가 크고 얼굴이 긴 편으로 미남이다. 어떠한 모양을 하고 있어도 고상하게 보이며 나이는 30세쯤이라고 말하였다.’ 2. 일본검찰의 이인영 심문조서에서는 문태수의 학문의 수준을 시골 학자 수준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유생의 범주에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문태서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근거로 하여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금강산 입산 및 병법연구’의 대표적인 사례는 김성진의 『의병대장 문태서연구』, 박민영의 『덕유산의 호랑이 문태수 의병장』 등이다.3. 문태서가 금강산에서 만난 박처사는 당시 안동군 임동면 출신이며 본명은 박인화로 추정하고 있다. 또 제주 법정사 항일투쟁의 주역인 ‘박주석’ 외손자 이태수는 자기 어머니로부터 들은 내용을 근거로 하여 박처사는 박주석의 다른 이름이며 문태수와 같이 활동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근거로 미루어 문태서가 금강산에 들어가 학문과 무술 등을 배운 박처사는 실존인물인 박인화로 각 종 자료에서는 추정하고 있으며,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1908년 1월에 등장하여 같은 해 5월에 밀정에게 사살되었다. 따라서 이렇게 막연한 전기문 수준의 문구는 사실적인 내용으로 수정되어져야 한다.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독립유공자 면암 최익현 공훈록에 따르면 거병을 결심한 시기가 1906년 2월이었으며, 실제로 거병한 시기는 4월 13일이다. 따라서 1905년에 최익현을 만나 거병을 논의하였다는 문구는 각종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김성진의 『의병대장 문태서 연구』에 따르면 문태서가 최익현을 만난 근거로 ‘문공행장과 문공가장’을 들고 있다. 하지만 ‘의병한성진격작전’을 위한 의진편성에서 13도 창의대장을 맡은 이인영에 대한 검찰심문조서 내용으로 인해 이 두 자료의 신뢰성은 매우 낮다. 검찰신문조서 내용은 또 다른 문구 검증을 위해 뒤에서 상세하게 살필 것이다. 또 다른 자료에 따르면 ‘1908. 11. 05. 함양. 거창 등지에서 의병장 文泰渟이 활약하여 다수의 부하 모집해 결사 동맹.’이라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1907년 12월 6일 전후로 이인영이 주도한 ‘의병한성진격작전’ 의진 편성 시 문태수를 호남창의대장에 임명한 것을 보면 역시 신뢰성이 떨어진다. 문태서부대가 벌인 전투로 추측할 수 있는 일본측 기록 중 가장 빠른 것은 1907년 7월 7일 오전 5시 육십령 전투이다. 의병수는 2백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측 숫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근대사연표에 따르면 1907년 8월 28일에 옥천에서 의병 60여 명이 투입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도 분석해 보면 문태서부대가 활동하고 있는 지역이다. 문태서부대 운영 원칙상 농번기에는 대규모 의병부대를 동원하지 않고 있기는 하나 본격적으로 의병전쟁을 시작한 시기를 추측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따라서 문태서가 의병전쟁을 시작한 것은 최소한 1907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당시 전북과 충남북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동신과 이석용부대에 참가하면서 시작되었고, 독립된 포수부대를 이끌면서 호남지역 의병지도자들 사이에서 명망을 확보해 나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07년 하반기에 덕유산 주변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는 다음과 같다. 10. 10. 삼남의병도대장 김동신, 의병 600여 명 인솔하여 경남 안의군 월성에서 일본군과 접전. 李錫庸·全垂鏞, 진안에서 창의동맹단을 조직하고 장수. 진안 일대에서 활약. 병항쟁의사 李錫庸 의병부대, 진안 석전리(현 진안군 백운면 석전리)에서 전투. 독립운동사 I. 병항쟁. 10. 11. 李錫庸 의병부대, 장수 배룡리(현 장수군 천전면 비룡리 추정)에서 일진회원 섬멸. 독립운동사 I. 의병항쟁. 10. 22. 의병장 김동식, 李錫庸 의병 100명, 전북 심원암(현 진안군 정천면 심원사)에서 부근서 일본군과 교전. 고종시대사 6. 호처원독립운동사 1 p. 714. 의병 약 100명, 전북 진안 부근에서 접전. 원호처 독립운동사 (제 1권) p. 714. 이러한 추정은 평민이면서도 창의대장에 임명된 신돌석이 포수부대를 이끌고 있었으며, 역시 평민이었던 문태수도 포수부대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양반 유생들로 구성된 ‘의병한성진격작전’ 지도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추론하는 것이 타당하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이 문구는 기본적인 요건도 갖추지 못한 아무런 근거도 없는 막연한 문장이어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 없으며, 더구나 공훈록 문구로서는 매우 부적절하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 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1.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문태서는 1909년 초순 경에 전상진(전성범으로 추정)과 박춘실이 이끄는 부대를 통합하여 의진을 재편성하였다. 2. 문구에서 이야기하는 팔공산은 현 장수군 장수읍 대성리에 위치한 산이며, 높이가 1151m이다. 임실군과 진안군, 장수군, 그 당시 용담군을 경계짓는 전라북도 동부 산악지역이다. 위와 같은 기록과 사실을 종합해 볼 때 각종 공식 관련 기록에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팔공산을 공훈록에 집어넣은 것은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사실화시킨 대표적인 문구이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대한제국/근대사연표에서 ‘의병’ 관련 단어로 검색을 하면 9300여 건이 검색되며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도에도 의병전투가 몇 건 되지 않았으며, 1906년이 되어서야 4월에 ‘최익현’을 시작으로 하여 항일의병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 일본은 한국강제 병합 이후에서야 1910년 9월 12일 발표한 조선주차헌병조례공포를 통해서 치안조직을 완성하게 된다. 헌병이 조사경찰과 일반 치안 유지를 위한 경찰 행정을 담당하고 전국에 7개 부대, 57 관구, 257 분견소, 41개 파출소, 4개 출장소를 설치하고 정규헌병 2369명, 헌병보조원 4392명 총 6761명의 헌병 병력을 배치하였다. 부대당 평균 400여 명, 관구당 평균 42명, 분견소당 평균 정규헌병 약 9명 헌병보조원 17명으로 분견소당 25명 내외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1907년부터 조직된 경찰 조직은 1914년에 경무부 13, 경찰서 101, 순사 파출소 108, 순사주재소 504였으며 인원은 경찰병력이 5,756명이었다. 당시 장수군에는 헌병 조직이 없었으며 진안 경찰서 장수 순사 주재소가 있었다. 따라서 장수읍 내에는 병력이 거의 없었다고 판단할 수 있으며, 장수읍을 습격한 후 퇴각하는 의병들을 쫓을 병력이 없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당연하다. 더구나 무주구천동 지역은 의병들은 지형지물에 익숙하지만, 일본군경에게는 매우 불리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본군경이 무주구천동까지 추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각 종 기록들을 보면 일본군들이 무주군천동까지 진격한 시기는 덕유산을 경계로 하고 있는 전북, 경북, 경남 주둔 일본군들의 연합토벌대가 구성된 이후이다. 공식기록에 의하면 ‘朴先鋒 의병부대가 茂朱郡 橫川面 九千洞 白蓮庵에서 무주헌병분견소 외 4개소의 연합토벌대와 교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라는 문구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김성범이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으며 ‘전성범(全聖範)’을 제대로 알지 못한 일부 식자들이 항간의 이야기를 문서화 한 것이다. 전성범을 만난 시기는 이미 위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일본헌병대 및 경찰의 보고가 있었기 때문에 그 기록을 인정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 일본군경 30여 명 사살, 아군 7명 전사, 무기 40여 정 노획 등의 전과 자료를 인정한다면 당시 전투 규모로는 대규모이다. 이러한 전투가 당시 황성신문이나, 일본군경의 보고에 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성을 의심할 여지가 충분하다. 따라서 이 기록은 해당 지역에서 구전으로 전해져오는 이야기들을 사실화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구체적인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수정되어져야 할 부분이다.   1) 훈1) 1908 대한제국 행정지도, 2020 대한민국 행정지도2) 統監府文書 6권 一. 憲兵隊機密報告(827) [賊魁 文泰洙의 행동에 과한 慶尙南道 安義分遣所長의 보고] 憲機第二三一二號3) 統監府文書 8권 一. 憲機第一三四五號 李麟榮 審問調書4) 김성진, 「항일의병대장 文泰瑞(洙)硏究」, 함양문화원, 1999, p.81 ~ 905) 박민영, 「덕유산의 호랑이 문태수 의병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6)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 박처사」7) 독립운동사 제11권 한말 후기의병 / 제4장 후기의병의 확산 / 3. 경상·충청도의 의병항쟁8) 한금순,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의 역사적 고찰」, 서귀포신문 2018.10.04. 다음으로 육지부에서내려왔지만 법정사 내에 거주하지도 않았으면서 주도세력으로서 활동한 박주석과 최태유에 대해 살펴보겠다. 본 연구자는 박주석과 최태유의 『수형인 명부』 상의 출생지 주소 또한 장임호의경우처럼 존재하지 않는 면과 리 명임을 밝혀내었다.박주석은 『수형인 명부』에 ‘진도군 동면 상리’를 출생지로 기록하고 있으나 외손 이태수의 증언에 의하면 박주석은 경상북도 안동 사람이다. 유족 이태수는 박주석은 안동에서의 의병 활동 전력 때문에 제주도로 도피해 왔으며, 거짓 주소를 말한 연유도 이러한 전력을 숨기기 위한 것이고,법정사 항일운동 이전의 의병활동 행적과 연관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기 때문에 옥사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의병활동에 대해서는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 때문에 더욱 확신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태수는 『독립유공자 공훈록』의 안동 사람 ‘박처사’가 『수형인 명부』의 박주석의 이명으로 기록된 ‘박처사’와 일치하고 있고 어머니에게서 전해들은 문태수 장군과의 연관성등으로 안동의 박처사가 박주석일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문태수는 호남의병단의 의병대장으로금강산에서 박처사에게 병서를 받아 의병활동을 한 인물이다. 박주석은 박명수 또는 박처사라는이명을 남기고 있는데 유족 이태수는 안동에서 의병활동을 한 박처사가 박주석과 동일한 인물이라고 보고 옥사한 이유도 그 행적과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연구는 더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9)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최익현」10) 김성진, 「항일의병대장 文泰瑞(洙)硏究」, 함양문화원, 1999, p120.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대사연표, 고종시대사 6. (1908.) 11. 05.12) 주차한국군 전투상보, 「密大日記-M40-6-13 C03022895300071101」1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대사연표, (1907.) 08. 281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대사연표, 검색주제 ‘김동신-이석용’ (1907.) 10.01 ~ 12. 1315)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 의병편Ⅵ (三) 三月, 慶尙道, 「暴徒 討伐에 關한 件」16)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4 의병편Ⅶ (二) 五月, 全羅道, 「暴徒에 關한 件」1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대사연표, 검색주제 ‘의병’ (1904.) 10.01 ~ (1907.) 12. 3118)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0권 의병편Ⅲ (二) 四月, 慶尙道 「通報」1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대사연표, (1907.) 9.2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2)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1. 무단통치체제의 확립 >2) 조선총독 지배하의 탄압기관 > (1) 헌병경찰체제2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대사연표, (1908.) 0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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