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1. 문태서 독립유공자 공훈록경남 안의(安義) 출신이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 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1)2. 민간 기록을 근거로 작성된 ‘문태서 독립유공자 공훈록’공훈전자사료관에서 밝히고 있는 문태서 독립유공자 공훈록 작성 근거가 되는 문서와 출처는 다음과 같다. 매천야록 438·513면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224면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599·710·819·829·832·917·1203면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84·534·536면매천야록 438, 513.438면 - 全羅南北道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6월 이후에는 관동과 영남 지방에서만 의병이 치성하고 오직 호남 지방에서는 의병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호남을 위해 부끄럽게 생각하였는데, 이때 李錫庸은 任實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金泰元은 咸平, 奇三衍은 長城, 文泰洙는 茂州, 高光洵은 同福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시 소란하였다. 그러나 이때 그들은 軍糧과 장비가 없고 기강도 없어 감히 일병들과 血戰을 벌이지 못하고, 오직 형세만 취하여 소란만 일으키고 있었다. 이때 金泰元은 기발한 전략을 많이 사용하여 전후로 많은 일병을 살해하고, 文泰洙는 騎馬를 잘 하여 호남과 영남 사이를 왕래하면서 민심을 얻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 그를 숨겨 주었으며, 李錫庸은 왕래를 신속히 하였으므로 일본인들은 그의 肖像을 돌려 염탐하였으나 결국 체포하지 못하였고, 高光洵은 지리산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2)513면 - 의병장 文泰洙가 伊院驛 정거장에 있는 일병들을 습격하여 그들을 火葬하였다. 이때 伊藤博文이 사망하여 일병들의 통행이 빈번하였으나 문태수는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義憤을 발하므로 원근 사람들은 매우 소란스러웠고, 일본인들도 매우 놀라 철저히 戒嚴을 하였다.3)명치백년사 총서(김정명)1권 224면해당 사료는 찾아서 확인할 수 없었으나 특별한 기록은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599·710·819·829·832·917·1203면598 ~ 602면 - 박동식 이용이 등 문태서 의병부대 재판 기록 709 ~ 710면 - 박동식 재판기록818 ~ 819면 - 강이봉 재판기록829 ~ 830면 - 박순용 재판기록917면 - 한진수 재판기록1203면 - 참1발 제388호 명치 42년 5월 24일 참모총장 한국주차군사령관의 보고 함양수비대의 일부는 5월 8일 전라북도 장계장(長溪場) 부근의 산봉우리를 점령한 약 1백 30명의 적을 공격, 적 13명을 살해, 3명을 포로, 총 5정을 노획하였음.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84·534·536면484면 - 해산군인 출신 의병장 전라/ 서안경(徐安京 : 하사)·강사문(姜士文 : 포수(砲手)·염기준(廉基俊 : 포군(砲軍)·정원집(鄭元執 : 참위)·문태수(文泰洙 : 하사)·이초래(李初來 : 참위)·강재천(姜在天 : 영관(領官))·양상기(梁相基 : 병졸)534면 - 충청북도 각지의 주요 의병장과 활약지 [1907.8~1909] ○ 문태서(文泰西) : 영동·옥천·청산536면 - 경상북도 각지의 주요 의병장과 활약지 [1907.8~1909] ○ 문태수(文泰洙) : 상주 경상남도 각지의 주요 의병장과 활약지 [1907.8~1909] ○ 문태수(文泰洙) : 안의 537면 - 전라북도 각지의 주요 의병장과 활약지 [1907.8~1909] ○ 문태수(文泰洙) : 무주·금산3. 근거가 부족한 민간 기록을 근거로 작성된 공훈록총 4문단으로 이루어진 공훈록을 요약하여 문제점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문단 - 문태서의 용모와 의병 거병시기 등을 기록하고 있으나 각 종 기록에 나타난 내용들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인명, 지명 등의 오류가 많다. 2문단 - 문태서가 본격적인 의병전쟁을 벌였던 내용을 기록하고 있으나, 미확인 전투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확인된 전투도 일자와 장소 전투규모 등이 당시의 기록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각 종 언론보도 자료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3문단 - 문태서 단독으로 서울로 진격하여 이등박문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황당한 기록과 고향에서 체포되었다는 기록은 많은 기록을 검토한 결과 허구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4문단 - 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1)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 1986.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18962) 湖南義兵 全羅南北道義兵起. 六月以來, 關嶺義兵日熾, 獨湖南無之, 人爲湖南羞之. 至是, 李錫庸起任實, 金泰元起咸平, 奇三衍起長城, 文泰洙起茂朱, 高光洵起同福, 一時風動. 然無資裝, 無紀律, 不敢搏倭血戰, 惟作形勢, 擾之而已. 泰元, 多奇略, 前後斬馘甚多, 泰洙, 善拊御, 往來湖嶺3) 義將文泰洙, 襲倭伊院驛停車場, 火之. 因博文之死, 倭之通行尤頻. 泰洙, 乘機奮發, 遠近震擾, 倭大驚, 戒嚴甚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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