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1909년 9월 1일부터 약 두 달간 일본군경이 의병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기 위해 진행한 ‘남한폭도대토벌작전’ 이후 국내 의병활동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특히 덕유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의 의병활동은 궤멸수준에 이르러 각종 기록에서 전투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그 까닭은 ‘하얼빈 이토오 사살’과 ‘이원역 습격 및 소각’을 하나로 연결시킨 일본군경들이 다시 대대적으로 의병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일본군경들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대다수의 의병지도자들이 만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가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전쟁’에서 ‘독립을 위한 투쟁’으로 전환되는 때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문태서와 그 의병부대들도 이 시기에 홀연히 사라졌으며, 문태서의 행방조차도 알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하지만 일본군경의 끈질긴 추적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문태서의 행적이 한 지방 신문사에 의해 알려졌다. 이 언론에서 ‘문태서 체포’ 기사를 작성하여 보도함으로써 이 기사가 문태서 의병대장의 마지막을 확정하는 자료가 되어버렸다. 이 기사에 의해 ‘문태서는 체포되었으며, 여러 감옥을 전전하다 옥중에서 사망하였다’는 확인되지 않은 역사 기록이 남게 되었다. 과연 그 기사가 사실이었을까? 그리고 이 기사와 맥을 같이하는 각종 연구자료들은 얼마나 충실하게 기사를 검증했을까? 연구자는 처음부터 ‘문태서는 체포되었으며, 여러 감옥을 전전하다 옥중에서 사망하였다’는 각종 기록의 의문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해석해 보았다. 아마 이 주제는 문태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충격을 줄 수 있으며, 추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아울러 오랫동안 연재되었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을 것이다.1. 의병대장 문태서가 순국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자료와 연구물문태서와 관련된 대부분의 자료와 연구물들은 의병대장 문태서가 추석 성묘를 위해 함양군 서상면 고향을 찾았다가 서상면장과 그의 꾐에 빠진 고향친구들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헌병대안의분견소로 압송되었다가 진주감옥으로 이송되었고, 대구감옥을 거쳐 경성감옥에서 순국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이 문태서의 마지막을 그렇게 적고 있는 객관적인 근거는 부실하기 그지없다. 그 자료들이 내세우는 가장 믿을 만한 자료는 당시 발행되고 있던 신문기사의 철지난 보도자료밖에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증언이라는 이름으로 채집된 간접경험자들의 진술이다. 먼저 그러한 자료와 연구물들을 살펴보고자 한다.1) 독립운동가 공훈록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중 문태서 공훈록에서는 문태서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2) 이달의 독립운동가 문태수국가보훈부에서 1992년 1월부터 매달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이달의 독립운동가’라는 주제 하에 독립운동가를 소개하고 있다. 2008년 2월에 문태서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지정하여 문태서를 소개하였다. 이 글에서 문태서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국치 후 선생이 전개한 최후의 항일전은 1911년 여름 장수헌 병대를 기습한 것이다. 8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선생은 그동안 수차례 공략전을 결행했던 장수로 들어가 헌병대를 기습한 끝에 10여 명의 일제 군경을 사살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한 뒤 신속하게 덕유산 원통사를 향해 철수했던 것이다. 하지만, 선생의 의진은 계남면(溪南面) 갈평(葛坪), 계내면(溪內面) 삼봉리(三峰里) 일대에서 추격해온 일제 군경의 파상적 공격으로 대부분의 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선생은 이때 겨우 탈출에 성공하여 덕유산을 넘어 함양 안의 방면으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이후 각지를 전전하며 피신하던 선생은 1911년 8월 17일 일시 고향을 찾았다가 일제의 사주를 받은 지인들의 흉계에 속아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써 5년간에 걸친 선생의 항일전은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피체 후 선생은 안의 헌병분견대를 거쳐 진주로 호송되었다가 다시 대구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옥중에서도 선생은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34세를 일기로 자결 순국하였다.’
3) 항일의병대장 문태서 연구‘항일의병대장 문태서 연구’는 함양지역에서 오랫동안 문태서에 관해 연구를 하고 있는 향토사학자 김성진이 쓴 책이다. 김성진은 이 책에서 의병대장 문태서는 ‘11년 8월 17일 오후 2시 주막에서 체포, 헌병대 안의분견소 송치, 진주감옥 이송, 대구감옥 전옥, 경성감옥 전옥, 1913년 2월 4일 10시 순국하였다’고 적고 있다. 순국 후 유해 인수자가 없어서 형리들이 공덕동 뒷산에 묻었으며, 숙부가 나무에 위패를 써서 표식해 두었으나 일제 36년 동안 후손들이 흩어져서 성묘는 불가능했고, 산소도 찾지 못하고 망실되었으며 고향에서 가묘를 써서 안장한 후 1963년 국립묘지에 이장했다는 구두 증언을 참고로 하고 있다.4) 문태서의 생애와 항일투쟁이용철은 문태서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하고 있는 우리나라 군역사 전문가이다. 문태서에 관해 쓴 최초의 논문이 ‘문태서의 생애와 항일투쟁’이다. 이후 그는 지속적으로 문태서에 관한 자료를 연구하여 논문으로 발표해 왔다. 그는 ‘문태서의 생애와 항일투쟁’이란 논문에서 문태서의 마지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문태서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순국했는지까지는 현재로서는 여전히 구술자료에 의지할 수 밖에 없겠으나 적어도 체포시기와 과정만큼은 경남일보의 기사처럼 1911년 8월경 주민의 밀고가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5) 해당지역 민간 자료들- 함양군지, 무주군지, 문태서가장, 문태서행장 등문태서가 활동했던 함양군 안의지역, 무구군 안성지역, 거창군 북상지역 등에 흩어져 있는 각 종 자료들 중 참고할 만한 자료는 함양군지, 무주군지, 문태서가장, 문태서행장, 해당지역 문화원 발간 책자 등이다. 이들 자료에서 찾을 수 있는 문태서의 마지막에 대한 공통점은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체적으로 살아있는 2세대들의 증언, 경남일보의 기록 등을 근거로 적고 있으며, 체포날짜를 1912년 8월 17일로 적고 있다.
6) 경남일보 기사1909년 10월 15일에 창간하여, 대한민국 지방신문의 모태가 되었던 경남일보에서는 1911년 10월 27일자 신문에서 문태서 체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문적포로상황 적괴문태수는 원래 진위대의 하사로서 1907년 9월경부터 팔십여명의 부하를 인솔하고 경남에서는 안의, 산청, 함양, 하동 전북에서는 금산, 무주, 진안, 장수, 여산, 익산 충북에서는 영동, 황간 등 각 군으로 다니면서 주재소 습격, 철도 운행 방해, 살인방화, 금전약탈 및 폭거를 저지르고 다니다가 토벌대의 수색이 엄중해지자 종적을 감추었으며, 지난 8월 안의군 서상면 영탑동(현 서상면 상남리) 영각사에 잠복하였는데 해당지역 면장이 이를 알고 면민을 동원하여 문태수를 포박하여 안의군현병분견소에 송치하여 그 공을 치하하여 면장 이하 면민에게 상을 주었다고 하더라.’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문태서 의병대장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는 대부분의 공식 및 비공식 자료들은 1911년 10월 27일자 경남일보 기사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경남일보의 기사에 대한 검증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각종 기록들과 교차검증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이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며, 문태서의 마지막을 새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1)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정보, 문태수. https://e-gonghun.mpva.go.kr2)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문태수.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pCrusaderDetail.do3) 김성진, ‘항일의병대장 문태서 연구’, 함양문화원, 2019.4) 이용철, 군사사연구총서 10집 ‘문태서의 생애와 항일투쟁’,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2.5) 이용철, 군사사연구총서 10집 ‘문태서의 생애와 항일투쟁’,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22. 189쪽6) 한국신문아카이브, ‘문적포로상황(文賊捕擄狀況)’,경남일보. 1911.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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