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녹아서 비나 물이 된다는 우수가 지났다. 이제 겨울도 끝물인가 보다. 올 겨울은 유난히도 눈이 자주 오고 많이 쌓여, 설경을 만끽하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길에 쌓인 눈을 치우느라 고생도 이만저만 아니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리의 말이 유난히 와닿았다. 두툼하게 쌓인 눈을 싸리비로 쓸지 않으면 단 한 발짝도 문밖을 나설 수 없는, 면에 사는 지인의 안부가 걱정되어 물었더니 톡으로 그림 하나로 답신을 대신했다. 나 이렇게 지내노라고.그림은 조선 후기 문인화가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의 ‘매화서옥(梅花書屋)’이다. 하늘이 어두운 먹색으로 꽉 채워진 걸 보니 저녁 시간이겠다. 왼쪽에 희붐하니 둥근 것은 달로 보인다. 높은 산봉우리가 화면을 가득 채우다 못해 정상은 잘려서 보이지 않는다. 바위들 사이 여기저기 대나무가 눈 속에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아직 겨울이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눈덮인 초옥 한 채, 초옥에는 둥글고 큰 창이 나 있고 방안은 환해서 따뜻한 느낌이 든다. 휘장이 걷어진 틈으로 가까이 들여다보니, 창을 등지고 앉은 상투 튼 선비가 서책을 읽다가 책상 위 화병에 한 가지 꽂혀있는 매화를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매화 향기에 혼곤히 취해 상념에 잠겨 있는 듯싶다. 집 주위에는 나무들이 둘러서 있고 전면에는 키 큰 나무가 서 있다. 방 안 화병에 매화가 꽂혀 있는 걸 보니 매화나무가 분명하다.검은 먹빛 위에 점점이 흰 것은 눈꽃인가 실제 꽃인가. 매화가 눈꽃처럼 가득 핀 것 을 보니 실제로 핀 것일 수도 있고, 아직은 겨울이지만 눈꽃이 난만한 걸 보고 얼른 봄이 와서 매화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표현한 걸로 보아도 좋겠다. 아무러면 어떤가, 그림 해석은 감상자에게 주어진 자유이니까. 그리고, 문인화에 따라붙는 화제(글)은 오른쪽 바위에 겨우 끼워 넣은 재치도 감각 있다. 전체적으로 그림이 화면이 꽉 차게 충만하고 먹 쓰임과 필치가 자유분방하다.우봉 조희룡은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우봉은 3살 위인 추사를 흠모하여 스승으로 모셨지만 추사는 우봉의 그림을 “문자향이 없고 손재주만 뛰어나다”고 내쳤다고 한다. 조선시대 문인화는 배경을 채색하지 않고 필치도 간결하게, 여백과 절제의 미를 중시했다. 그러니 화면을 꽉 채운 구도, 거칠게 빠른 속도로 그려나간 우봉의 그림을 추사가 혹평할 수밖에. 우봉은 당시 문인들과 달리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 기량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고 했다. 단적으로 평하자면, 추사가 ‘문인’이었다면 우봉은 ‘화가’에 가까웠다고 본다. 우봉은 매화에 미쳤다고 할 정도로 매화 사랑이 지극했다. 특히 붉은 홍매를 사랑했다. 매화 그림 병풍을 두른 방에서 매화차를 마시고 매화 문양의 벼루에 먹을 갈아 매화 시를 쓰고 매화를 많이 그렸다. 매화는 사군자의 하나로 많은 선비들의 시서화에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당시 매화 그림은 겨울 찬 기운 뚫고 나온 두어 송이로 선비의 기개를 표현했다. 사람의 마음 표현이 중요하지 매화가 주인공이 아니다. 그러나 우봉의 매화 그림은 마치 무희의 춤처럼 화려하고 난만하다. 매화를 위한 헌정화이다. 기록에 의하면 우봉의 매화 그림은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그의 자유롭고도 낭만적인 화풍을 추종하는 화가들도 점점 늘어, 조선 후기에 문인화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추사 김정희선생은 초등학생도 잘 아는 데 우봉 조희룡선생은 아는 이가 별로 없다. 미술사 연구를 통해서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간송미술관에 가면 우봉의 그림을 볼 수 있고, 우봉이 3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전남 신안군 임자도는 ‘홍매화의 섬’으로 지정되어 조희룡 선생을 기리고 있다. 섬 전체에 홍매, 백매가 그득 심어져 있어 봄기운 완연할 때 나들이 한번 다녀올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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