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지방소멸의 위기 한가운데 있다. 65세 이상 인구가 50%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지방소멸하면 자연스럽게 연관되는 단어인 세대간 불균형, 청년세대 유출, 출산율 감소, 전입인구 감소 등 함양군은 그 무엇에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더 청년세대가 중요하다. 청년세대는 지역의 활력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청년세대가 지역에서 재밌게 지내는 것은 청년인구 유출을 막고 청년세대 유입을 증가시킨다. 출산율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청년들은 함양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함양에서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함양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함양 청년을 만나본다. <편집자주>   가족의 가게에서 나만의 가게로 함양에서 자란 전영광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도 해보고, 고기 정육도 배우는 등 사회생활을 빠르게 시작했다. 군대 제대 이후에는 창원에서 택배 일을 오래 했다. 생계를 위해 다양하게 도전했고, 택배 트럭을 장만해서 개인사업자로 일했다. 함양에 돌아온 건 일손이 부족하다는 부모님의 연락을 받고 결정했다. 택배업을 정리하고서 함양으로 돌아와 부모님과 남동생, 그리고 전영광씨까지 4명이서 창선수산을 이끌었다. 가게는 성장했고 2019년에 확장을 했지만, 코로나19가 터지며 모든 일이 멈췄다. “코로나가 터졌을 때는 아예 문을 닫았어요. 처음에는 포장만 하고 매출도 바닥쳤어요. 또 회는 생물을 다뤄야 하니까 고기를 받아놔야 하는데 많이 받아놓을 수도 없었고요. 정말 상상도 하기 싫었어요.” 인생에 첫 번째 좌절을 겪은 전영광씨는 월세 정도 조금 쥐고서 다시 창원을 찾았다. 자존감도 바닥에 상황도 좋지 않았다. 전영광씨는 일용직을 전전하며 체력과 정신을 갉아먹는 두 달을 보내다가 홀린 듯 저녁 버스를 타고 고성을 향했다. 그리고 통영까지 걷기 시작했다. 통영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할 즈음 해가 뜨고 있었다. “그땐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길도 위험한데 그냥 계속 걸었어요. 그런데도 중간에 멈추지 않고 끝까지 계속 걸었던 이유는 뭔갈 해내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창원에 정말 배워보고 싶은 스타일의 한식 주점이 있었어요. 창원 상남동의 미담이에요. 연락도 못 해 보고 있었는데 고성에서 통영까지 걸었던 그 날, 무작정 전화해서 일 배우고 싶다고 연락했어요.” 그 연락은 심해에 빠져있던 전영광씨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다. 전영광씨는 그렇게 자존감 바닥으로 방황하던 시기를 청산하고 최선을 다해 일했다. “여기서 실패하면 정말 끝일 것 같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정받았어요.” 일을 시작하고 안정적으로 1년을 보내던 어느 날, 부모님의 연락으로 운명처럼 다시 함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가게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영광씨는 부모님이 20년 동안 운영한 횟집 앞에 서게 됐다. 새로운 변화, 그리고 부담감 창원에서 배운 한식 주점을 베이스로 도시 감각의 가게를 하고 싶었던 전영광씨는 끝까지 고민이 많았다. 창선수산 가게도 내놨다. 내 사업을 한다면 새롭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놓은 가게는 팔리지 않았고, 마땅히 새로 시작하기 좋은 자리도 없었기 때문에 창선수산을 이어가는 선택을 하게 됐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횟집을 이어받았지만, 전영광씨는 여기에 자신의 색깔을 더하고 싶었다. 리모델링을 감행하고, 기존의 메뉴에 새로운 요소를 추가했다. 부산과 일본을 직접 방문해 회의 방식과 밑반찬, 메뉴 구성부터 접시와 수저까지 다양한 트렌드를 연구했다. 어쩌다 다른 도시에 가게 되면 1차부터 3차까지 전부 유명한 일식집을 갔다. 일본에서 회칼만 반나절 구경하면서도 심장은 더 두근거렸다. 하지만 변화에는 부담이 따랐다. “부모님이 했을 때는 안 그랬는데, 기존 손님들이 와서 ‘이 메뉴 왜 없어요?’ 하면 신경이 쓰여요. 전부를 다 만족시키고 싶은데 아직 어려움이 있어요.” 그럼에도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게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신선한 재료를 직접 손질하고, 회를 뜨는 방식에서도 차별화를 두었다. 손님들의 반응도 달라졌다. “한 손님이 ‘회가 부모님 때랑 너무 다르다. 근데 난 이걸 먹고 싶었다’고 말씀해주셨을 때 정말 큰 감동을 받았어요. 실제로 그 손님은 주에 두 세 번도 방문하세요. 제가 음식에 들이는 정성과 노력을 손님이 이렇게 알아볼 때 보람차요.” 그 한마디가 그에게 엄청난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단순히 새로운 메뉴를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고객과 새로운 고객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균형점을 찾고자 했다. “모둠회를 낼 때도 맛이 부족하고 저렴한 밀치 등으로 채우고 싶지 않았어요. 우선 다양한 횟감을 계절에 맞춰서 내면서 손님들이 남기고 가는 고기 종류를 체크하고 있어요. 함양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다 즐기는 최고 구성의 모둠회를 찾고 있어요.”   요리에 대한 철학과 프로페셔널한 마인드 전영광씨는 단순히 가게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 하나하나에 철학을 담고 있다. 부산과 일본에서 배운 점들을 활용해 보다 정교한 요리를 선보이려고 노력한다. 특히, 그가 사용하는 칼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이건 내 자존감이에요. 이거 딱 잡으면 자신감이 생겨요.” 요시카네. 유명 요리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에서 나오며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이 칼은 이미 요리사 사이에서 좋은 칼로 정평이 나있다. 전영광씨는 칼을 보여주며 “개업에 맞춰 친구들이 선물해줬다”고 자랑하며 “아들이 성인이 될 때 물려주고 싶다”고 칼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좋은 칼을 쓰고, 재료 하나하나를 신경 쓰는 것은 그만큼 요리에 대한 그의 자세를 보여준다. 그는 손님이 기꺼이 돈을 내고 먹을 만한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모든 기준은 나도 사 먹을 수 있는 정도예요. 그래서 사이드 메뉴의 경우는 마진이 정말 거의 없어요. 그러면서도 기성 제품을 사용하는 건 단 하나도 없어요. 저는 그래야만 사 먹을 거 같거든요.” 가장으로서, 그리고 한 요리인으로서   최근 전영광씨는 아버지가 손을 거의 못 쓰게 되면서 가게 운영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지게 되었다. 이제 그는 단순히 부모님을 돕는 것이 아니라, 가게를 책임지는 사람이 되었다. 동시에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하다. 결혼 후 더욱 책임감이 커졌다. “이제는 다 내가 뜨고, 다 할 줄 아니까…” 그는 자신이 만든 가게에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다. 한때는 이 길이 자신의 길이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확신이 생겼다. “요즘에는 너무 매력적인 것 같아요. 회 뜨는 게. 제 유튜브에는 전부 회 뜨는 영상만 떠요. 매일 회 관련 유튜브만 보니까 계속 그것만 나와요. 자기 전에 보면 다음 날 와서 해봐야 해요. 그 과정이 정말 재밌어요.” 그에게 있어 요리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성장의 과정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 작업이다. 전영광씨는 메뉴판을 보며 “내 20대가 전부 여기 담겨있다”고 말한다. 갓 성인이 되고 처음 시작했던 정육도, 부모님 밑에서 시작했던 회도, 진심을 다해 배웠던 한식 주점 메뉴도 모두 여기 담겨있다. “이제 30대도 한 번 채워봐야죠.” 전영광씨는 오늘도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가게를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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