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10월 29일 문태서 의병부대의 ‘경부선 이원역 습격’을 직접 조사한 충북 영동경찰서장은 통감부에 보고하는 문서에서 폭도내습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1)(앞 부분 생략) 폭도내습의 목적은 주로 재화약탈에 있어서, 배일사상과 같은 목적은 전혀 없었으며 민간인 살상이 목적인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하얼빈 암살사건과 관련된 흔적은 전혀 없다. 그 이유는 만약 폭도가 확실한 배일사상에 의하여 일본인 살해를 목적으로 한다고 하면 이번 일을 거행함에 있어서 충분한 살해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폭도의 손에 의한 단 한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단지 폭도는 현금 40원 가량과 잡품 몇 점을 약탈한 것으로만 그치고 또 승객의 가장 근소하고 많아도 6, 7명을 초과치 않음으로서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마지막 열차가 진입하여 들어오는 데 대하여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고 황급히 도주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이를 인정한다.(뒷 부문 생략)과연 그랬을까? 충북 영동경찰서장은 이 사건을 단순히 의병부대가 물자 확보를 위한 습격으로 보았지만, 일본 정치권과 군부는 이 사건을 안중근의 이토오 히로부미 사살과 연결시키고 있었다. 그 증거는 일본이 이후 생산한 각종 공식 문서와 당시의 언론 기사이다. 일본이 이 사건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후 어떠한 대책을 수립해서 집행하고 있는지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원역 습격 및 소각’을 보도한 언론 기사도 함께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1. ‘경부선 이원역 습격 및 소각’ 이후 문태서 체포를 위해 일본군경이 기록한 문서 내용1) 경북수비수 제1211호-1 (忠北警秘收 第一二一一號의 一)   이원역을 습격한 폭도에 관하여 영동경찰서장의 보고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습격을 주도한 폭도 수괴 문태서는 11월 3일 경성에서 출발한 부산행 급행열차를 탔으며, 대전역에 내려 같은 날 다시 보통열차에 올라 이원역에서 하차하여 전라북도 금산군 기방리를 향한 흔적이 있음을 탐지하였다. 이자는 일명 문태수라 칭한다. 또 경성에 머무를 때는 박명운이라고 사칭하였다고 한다.   (2) 수괴 문태수와 그 일당은 현재 금산군 부남면에 잠복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영동경찰서장은 순사 6명을 인솔하고 11월 18일 밤에 급히 그 곳으로 향했다.2) 헌병대기밀보고 헌기제2312호 (憲兵隊機密報告 憲機第二三一二號) ‘적괴 문태수의 행동...’   (1) 경상남도 안의군 북상면 산수암리의 신종순은 안의군 군수가 창립한 양잠학교의 사무원인데, 1909년 11월 9일 오후 4시경에 돌연 한 한국인에 의해 유괴되었다가 다시 몇 명의 한국인에게 납치되어 북상면 황점리(일명 삼문리 - 안의 북서쪽 약 50리)에서 약 5리 떨어진 소나무 숲속으로 끌려갔다.   (2) 그 소나무 숲속에 이른 것은 이미 일몰 후로 적도 15명은 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그중 우두머리 문태수는 조선의 바지를 입고 검정 외투를 걸치고 순사도를 들고 있었으나 온화한 말투로, “네가 보듯이 우리들 의병은 군비가 모자라 병졸들 또한 의류가 찢어졌으니 군비로 100원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신종순이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대답하였더니, 문태수는 화를 내며 “네게는 돈이 없더라도 군수에게 몰래 이야기하면 돈을 내지 않을 수 없고 만약 내지 않으면 군수도 함께 살해하고 양잠학교도 불태워버리겠다”고 하였다. 결국 신을 중군대장 길(中軍大將 吉)에게 인도하였다.   (3) 그 후 여러 가지의 강압적인 요구를 받고 결국 목면 3필을 내겠다고 약속했더니 간신히 방환되었다면서 안의 읍내로 달아나 그런 취지를 안의분견소에 밀고하였다. 그리고 목면은 22일 사람을 보낼 것이니 그때 넘겨주도록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4) 적도 중 아래와 같은 담화를 하였다고 하며 일부는 요즈음 전성범(안의 부근에 출몰하는 폭도 우두머리)이 이학사의 부하가 되어 이 부근에 오면 이를 해산시키고 무기를 전부 몰수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일부는 그자 전성범도 무엇인가에는 소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좋겠다는 등의 담화를 하고 있다고 한다.   (5) 적도의 무기는 엽총 1, 봉총 1, 도검 3, 기타는 화승총 같이 보였다고 신이 말하였다. 문태수의 인상은 신장이 5척 4촌정도, 중간키에 살이 알맞게 찌고, 하얀 치아에 눈이 크며, 흰 살결에 콧대가 반듯하고 수염이 적고, 귀가 크고 얼굴이 긴 편으로 미남이다. 어떠한 모양을 하고 있어도 고상하게 보이며 나이는 30세쯤이라고 말하였다.   (6) 소나무 숲속에 있던 적도는 문 이하 15명이었으나 여러 가지 변장을 하는데, 혹은 농민으로 혹은 상인으로 가장한 척후가 곳곳에 있었다고 한다.   3) 안중근 및 심문 (287) [안응칠 제5차 진술내용]   1909년 12월 2일 감옥에서 담당 경시의 심문에 대한 한응칠의 제5회 진술 요지는 다음과 같다. (앞부분 줄임) 文泰洙는문 : 문태수를 아는가? 답 : 문태수는 모른다. (이하 생략)4) 헌기 제106호(憲機 第一○六號)   또 문태수에 대한 정보를 파악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문태수가 어느 지역에서 숙박을 하고자 할 경우 해당 지역의 주민을 주요한 장소에 배치하여 감시하도록 하고 있으며, 깊은 밤중에 1~2명의 부하를 인솔하고 다른 마을로 옮겨서 숙박하면서 안전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헌병수비대 등은 문태수의 숙박 정보를 입수하고 습격을 하여도 항상 사라진 후이기 때문에 헛수고를 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두고 주민들은 문태수를 신과 같이 숭배하고 있다.   (2) 또 토벌대가 문태수가 있는 곳을 알아내고 체포하기 위해 해당 지역에 도착하자 문태수는 토벌대 중에서 자기를 알아보는 자가 없음을 알고 스스로 토벌대 앞으로 나와 앞장서서 토벌대의 숙영을 위해 술과 음식을 준비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런 후 태연히 토벌대의 움직임을 자세하게 파악하여 두었다가 토벌대가 이동하는 길목에 부하들을 매복시켜 배치시켜 습격하거나, 토벌대의 작전을 저지시키는 활동을 빈번하게 하였다.   (3) 전라도 무주 지방 어느 부락에서는 문태수를 신과 같이 받들고 있으며, 아녀자가 밥을 지어 밥상을 차릴 때 덕유산 중에서 의병 활동으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문태수를 생각하면서 제일 먼저 문태수 밥그릇을 준비하고 문태수의 성공을 기도한다고 한다.   (4) 문태수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무주 지방으로부터 온 자의 정보에 의하면 문태수가 활동하고 있는 지역은 삼도봉과 덕유산 사이라고 한다.   5) 헌기 제454호(憲機 第四五四號) 적괴 문태서에 대한 검거 계획에 관한 건   헌병대전관구장 자체보고   금산분견소장의 보고를 참고하여 조만간에 대검거를 실시하고자 계획 중이다. 적 우두머리 문태서의 행동에 관하여 그와 연결된 윤이봉을 체포하여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과 금산군 부근에서 활동하는 폭도 우두머리로 지목된 길창서가 문태서의 부하로 활동하다가 본월 10일 해당 분견소 부대원에 의해 중상을 입고 죽기 직전 수시간 동안 진술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문태서와 함께 하고 있는 부하들의 이름과 출생지 나이 등은 다음과 같다.   - 문태서와 함께 활동하고 있는 35명에 관한 신상자료를 기록함.   - 위에서 기록한 자 외에도 같이 행동하는 자들 이 더 있다.   (2) 문태서는 부하에게 명하여 주간에도 반드시 농공상업 중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지역에서 생업에 종사하게 하여 토벌대와 경찰관 등과도 교류하고 있기 때문에 얼핏보면 일반인들과 구별하기 어렵다.   (3) 문태서는 특정한 곳으로 이동하고자 할 때는 먼저 부하 중에서 1 ~ 2명을 동반하여 출발하고 해당 지역에서도 항상 함께 행동하고 있다.   (4) 해당 지역에서 다른 부대원들과 집합하는 경우에는 부하에 대하여 어느 지역 누구네 집에 머무르고 있다고 알린 후 자기는 일단 해당 가옥에 들렀다가 다시 거주지를 비밀리에 옮긴다고 한다. (5) 주간에는 항상 부하들로부터 무기를 회수하여 부하들이 모르는 장소에 숨겨 두고 있다가 필요 시 지급하고 있다고 한다. (6) 문태서는 항상 정보원을 풀어서 토벌대 등의 행동을 탐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과 관청에서 일하고 있는 자들과 중요한 책임자 등의 성명을 파악하고 있다고 한다. 6) 고비수 제73호 폭도상황월보(1910.11.) 외 월보(~1910.07.) 10건 (1) 금산경찰서에서는 군대, 헌병, 연합토벌대 작전 결과 수명의 패잔폭도가 배회한다는 것을 탐지하고 엄밀수색을 진행하여 폭도 2명을 체포하였으며, 또한 적괴 문태수가 배회하는 기미가 있음을 포착하고 변장한 한인경부와 순사를 파견하여 수색을 속행하고 있음. (1910.01월보) (2) 이원역에 방화한 문태서는 전라북도 무주군을 근거지로 2월 중 무주 관내에 출몰하였으나 특히 그를 체포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부하 4명을 체포하였으나 아직 수괴를 잡지는 못하였다. (1910.02월보) (3) 금산경찰서에 있어서는 거물급 수괴 문태수 같은 자도 현재 몸을 숨기고 있어 어디 숨어 있는지 모르나 그 잔당의 출몰은 끊이지 않고 있어 주야로 그 수색에 노력하고 있음. (1910.03월보) (4) 수괴 이석용, 문태수 등은 지난봄 이래 거처를 숨겨 아직도 그 행적에 대한 단서를 잡지 못하고 있으며... (1910.06월보) (5) 무주, 용담, 금산군 지방에 출몰한 수괴 문태서 이하는 지난 달 이래 소재를 감추었는데 이래 그 지방은 매우 평온한 상태임. (1910.07월보)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원역 습격 및 소각’은 일본군경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으며, 이후 문태서를 체포하기 위해 군인, 헌병, 경찰 등 모든 군경들과 한국인 앞잡이들이 동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 기록이 남아있는 1910년 7월 말까지는 문태서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댓글0
로그인후 이용가능합니다.
0/150
등록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름 *
비밀번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복구할 수 없습니다을 통해
삭제하시겠습니까?
비밀번호 *
  • 추천순
  • 최신순
  • 과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