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1909년 10월이 다 되어 갈 무렵인 26일과 29일 양일 간 우리나라와 일본은 연이은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동아시아 침략의 원흉이자 일본 정치계 대부인 이토오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사살 당하였고, 10월 29일 일본이 아시아 대륙 침략을 위해 건설한 경부선 이원역이 문태서 의병부대의 습격을 받아 역 건물이 모두 불타고 일본인들이 끌려갔다. 연속된 두 사건은 일본의 아시아 대륙진출의 전략을 수정하게 만들었으며, 대한제국의 마지막을 앞당기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역사적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건을 연결지으려는 연구가 부족하여 ‘경부선 이원역 습격 및 소각’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연구자는 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그 사건이 초래한 역사적 사건들을 같이 엮어보고자 한다. 1. ‘경부선 이원역 습격 및 소각’을 기록한 자료들 1) 일본 경찰기록: 충북 영동경찰서 - 영비발 제374호(永秘發 第三七四號) ‘이원역 습격’ 외 11건 2) 일본 헌병대 기록: 한국주차헌병대장 사카키하라 쇼조(韓國駐箚憲兵隊長 榊原昇造) - 한헌경을 제1330호(韓憲警乙 第一三三○號) 외 8건 3) 통감부 기록: 헌병대기밀보고(憲兵隊機密報告) 헌기제2312호(憲機第二三一二號) ‘적괴 문태수(賊魁 文泰洙)의 행동에 관한 경상남도 안의분소장(慶尙南道 安義分遣所長)의 보고...’ 외 3건 4) 황성신문: 1909년 10월 31일자 ‘이원폭요(伊院暴擾)’ 외 4건 5) 대한매일신보: 1909년 10월 31일자 ‘의습이원(義襲伊院)’ 외 4건 2.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6 의병편Ⅸ (一)補遺篇 영비발 제374호(永秘發 第三七四號) 기록 - 발신자: 충북 영동경찰서장 - 수신자: 내부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松井茂) 앞서 보고한 이원역 폭도내습에 관한 건 상보는 다음과 같다. 1) 폭도내습 및 도주에 관한 조사와 그 상황 (1) 폭도 16명이 본월(10월) 27일 영동군 양남면 반포동 성참봉 집에 쳐들어와서 성창봄 둘째 아들(24세)을 납치하였다는 신고를 받고 다음날인 28일 영동경찰서 일본인순사 3명에게 한인순사 3명을 인솔하여 즉시 출동시켰다. 그런데 폭도는 아들을 납치하여 도주하면서 오늘(28일) 밤 다시 올테니까 그때까지 돈을 만들어 둘 것을 집주인에게 명령하고 돌아갔다. 그들은 다음 날인 28일 납치했던 아들을 풀어주고 그 대신 그 집안의 하인을 다시 납치하였으므로 10원을 주고 납치되었던 사람을 되찾아왔다. 집주인의 진술을 듣고 순사는 이 사실을 조사하면서 당일(28일) 밤, 같은 장소에 잠복하면서 폭도들의 재침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오지 아니하였기에 다음날 29일 양내면을 조사하고 시장에서 1박을 하고 있었던 중 적은 불탄리에 이르러 한 마을을 포위하고 금품을 강요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즉시 해당지역으로 가 추적을 하였다. 폭도들은 29일 오후 7시경 어디론가 도주한 후였다. 부근을 조사하던 중 양내면 신두리에서, 폭도는 29일 밤 이원역을 습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불탄리로 긴급출동 하였지만 적들은 다음날 오전 3시경 동면 양남리를 통과하여 금산군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 정보를 입수하고 그 방면을 조사하던 중 무주헌병과 수비병들이 정찰을 하고 있어서 서로 만나 정보를 교환하고 금산방면은 헌병과 수비병에게 넘기고 일행은 상대를 속이기 위하여 반대방향을 향하여 조사를 계속 진행하면서 같은 날 오후 10시 별다른 소득없이 영동경찰서로 돌아왔다. (2) 29일 오후 11시 지나 옥천순사주재소는 이원역 선로공부 모씨로부터 지금 이원역에 백여명의 폭도가 내습하여 지금 역사에 불을 질러 역사가 타고 있다는 긴급한 소식을 듣고 주재소 우치다(內田) 순사는 옥천읍내인(약 30정 떨어진 곳 약 3.3㎞) 김중 순사에게 긴급하게 연락함과 동시에 해당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에 대해여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를 준 후 즉시 현장으로 출동하였다. 동서 순사들이 이원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30일 오전 1시 30분으로 동서 순사들이 도착함과 동시에 영동으로부터 11명의 수비병이 도착하였다. 그리고 동 순사는 현장의 상황을 조사한 바 쳐들어온 폭도는 16명으로 29일 오후 10시 10분경 돌연 이원역 앞에 있는 작은 언덕에서 주차장을 내려다보면서 소총 7~8발을 발사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역사로 돌진해왔다. 역원 모두 도망함을 확인하고 역사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던 중 오후 11시경 심천역 방면으로부터 마지막 열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급히 이남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3) 29일 오후 12시 영동경찰서는 영동서장으로부터 지금 이원역에 폭도가 쳐들어와서 정차장에 불을 지르고 있다는 등의 급보를 받고 즉시 감독순사 이하 순사 4명이 정차장으로 달려와 이원역에 비치된 소화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지 물었으나 해당직원은 이미 역 앞에 거주하는 무주수비병의 기맥교통병 11명에게 대여하고 우리들에게 줄 장비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나 현장을 향하여 긴급하게 출동하여 30일 오전 5시에 도착하였으나 폭도들은 이미 도주한 뒤였다. 옥천주재소의 우치다(內田)순사와 병사 7명은 이 사건의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서로 의논하여 합동으로 부근을 정찰하였으나 적은 이남 방면으로 도주한 모양이다. 별 소득없이 뒤처리를 우치다(內田) 순사에게 명하고 11월 1일 돌아왔다. 2) 피해당시의 규모 (1) 10월 29일 오후 10시 10분 돌연 이원역 앞쪽에 있는 작은 언덕으로부터 16명의 폭도가 이원역에 쳐들어와 언덕 정상에서부터 총을 쏘고 고함을 지르며 역사로 진입하였다. 당시 이원역에 함께 있던 역장 오카다와 보조원, 작업일꾼 등 8명은 대피하려고 하였지만 폭도는 이미 역 앞쪽 언덕에서 일제사격을 하였기 때문에 대피를 할 수 없어 변소 혹은 목욕탕에 숨어 있었다. 이 때 폭도는 재빨리 역사에 들어와 실내외 각종 시설을 파괴하고 마지막에는 방화를 하였다고 한다. 목욕탕에 숨어 있던 역장 이하 오명은 화염에 둘러싸일 위험에 다다르자 목욕탕을 탈출하여 안전하게 대피하였다. (2) 야마구치 이타로오, 아베 킨고로오 2명은 사격을 받았을 때 역사 유리창을 깨고 탈출하는 순간 야마구치는 유리파편으로 오른쪽다리 피부에 약 폭 오분 길이 팔촌 깊이 3분의 부당을 입었지만 아베와 같이 심천주재소로 말을 타고 대피하였다. 기타 해당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이나 한국인의 피해는 없다. (3) 앞에서 언급한 이원역으로 들어온 열차는 역원과 그 가족 및 거류민 20명을 승차시켜 심천역을 향하여 되돌아가게 하고 이원역으로부터 영동역에 전화로써 보고하였다. (4) 대전역은 옥천역의 보고에 의하여 임시열차를 만들어 병원 약간명을 승차시켜 피해 현장에 30일 오전 2시경 도착하였다. 3) 피해물건 및 가격 (1) 역사 1동 24평 5합 전소 - 손해액 2천원 (2) 역청사 비품 다부렛트(등사기) 외 일체 기구 소실 - 가격 1천 2백원 (3) 역장 관길쇠(官吉鎖) 4본 장자(障子) 1본 파괴 - 가격 약 10원 (4) 수제포(手提鞄) 1개, 백모포(白毛布) 1격(檄), 괘궤(机掛) 1매, 관급외투(官給外套) 1매, 창측회중시계(鋹側懷中時計) 1개, 니켈회중시계(니켈懷中時計) 1개, 관급조역복상의(官給助役服上着) 1매, 역부복 1, 역부외투 2, 현금 약간 - 합계 85원 4) 폭도 심수괴(핵심수괴)로 인정되는 자 및 대원 수 년령 복장 및 무기 (1) 폭도수는 16명으로 연령 복장 및 앞에서 언급한 행동을 종전에 피등의 한 행동을 예로 비교하여 이번 것을 고찰하건대 이 폭도는 항상 관내 각지에 배회한 수괴 문태서 및 그 부하 15명이라 인정된다. 연령은 대개 30 전후의 성인들로 복장은 흑색 혹은 백색의 한복을 입었으며, 다 관과 망건을 쓰지 않고 헝겊조각으로 머리를 둘러 묶었다고 하였다. 총기는 양총과 화승총을 섞어 13정(30년식 무라다총 케이스 수 1개 모젤테이스, 장탄의 것 1개 연탄 2개로 현장에 남겨져 있었으므로 이를 추정하였다. 그 외 2 권총 1개 칼 1점을 휴대하였다 한다. 5) 폭도내습의 목적 (1) 폭도내습의 목적은 주로 재화약탈에 있어서, 배일사상과 같은 목적은 전혀 없었으며 민간인 살상이 목적인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하얼빈 암살사건과 관련된 흔적은 전혀 없다. 그 이유는 만약 폭도가 확실한 배일사상에 의하여 일본인 살해를 목적으로 한다고 하면 이번 일을 거행함에 있어서 충분한 살해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폭도의 손에 의한 단 한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단지 폭도는 현금 40원 가량과 잡품 몇 점을 약탈한 것으로만 그치고 또 승객의 가장 근소하고 많아도 6, 7명을 초과치 않으므로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마지막 열차가 진입하여 들어오는 데 대하여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고 황급히 도주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이를 인정한다. 6) 폭도의 수색 속행상황 (1) 경찰서 순사 6명과 옥천주재소 순사 4명을 각 개별로 정탐을 위하여 풀고 엄밀히 수색중이 나 아직 아무런 소득이 없다. 이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 도중에 영동군 양내 방면에 폭도가 잠복하고 있는 정황이 있다는 정보를 받고 순사감도 이하 오명을 급파하였다. 7) 피해자 등 보호 상황 (1) 본직은 경찰부에 열린 서장회의를 마치고 30일 오후 경찰서로 돌아와 당일 이원에 출장하여 역원 및 주재소 거류민 등을 세세히 위로하고 당일 밤 현지에서 1박을 하고 오늘 경부 신상호 이하 3명을 현지에 머무르게 하고 이들을 보호하게 하며, 심천과 옥천방면으로 피난중인 부녀자 등 모든 민간인들은 오늘자로 집으로 돌아갔으며, 치안이 원래상태로 회복되었음을 인정하였다. 기차 운전에 대하여는 하등의 피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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