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의병 모집 방법일본군경과 의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의병을 꾸준히 모집해야 하고, 군수품을 확보해야 하며, 총기와 탄약을 꾸준히 보급해야 한다. 지난 주 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문태서는 일본군경과의 지속적인 의병전쟁을 벌이기 위해 유격전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는 전투는 가능하면 피했으며, 소규모 부대 단위의 전투를 펼쳤기 때문에 의병부대 규모도 상황에 맞게 짜여졌다. 이러한 부대 운영방침에 맞게 의병들을 자발적인 참여와 호소, 한시적 동원, 강제징집 등의 형태로 확보하였다.자발적 참여와 호소자발적인 참여와 의병 참여 호소는 문태서가 의병을 모집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의병’은 ‘국가가 위태로울 때 자발적으로 일어서서 적과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강제징집’은 고려되지 않았다. 누군가 의병의 기치를 들면 그 뜻을 따르는 무리가 형성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참여를 호소하면 또다른 무리들이 합류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1908년 11월 5일자『大韓每日申報』에서는 ‘문태서가 용맹을 겸비한 수십명과 결사동맹을 맺었다.’라고 보도하고 있다.1) 문태서와 함께 하는 용력있는 수십명이 결사동맹을 맺는 것은 자발적인 참여 없이는 불가능한 행위이다.   일본군경과의 전투에서 가장 필요한 포수 확보를 위해서도 문태서는 자발적인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김동신 의병부대에서 소총부대를 운영한 경험이 풍부하고, 이 소총부대를 이끌고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한 적이 있는 문태서는 항상 서양식 신식소총 및 실탄 마련에 애를 썼다. 서양식 신식총 마련을 위해 서울에 다녀온 문태서는2) 이 총기를 사용할 수 있는 포수들을 모집하였다. 1909년 4월 17일자 『大韓每日申報』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3) ‘의장행동 경상북도의병장 문태수씨가 부하 500여명을 데리고 전북 금산, 용담, 무주 등 각 군에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 포수를 다수 모집하는 중이라더라’문태서는 이와 같이 자발적 참여와 호소로 전투에 필요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지역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을 수 있었다. 일본군경들도 문태서의 의병부대 운영 능력을 칭찬하고 있으며, 각 종 언론에서도 문태서 의병부대의 엄정한 군기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자발적인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발적인 참여를 보여주는 더 놀라운 사례를 언론에서 찾을 수 있다.   1909년 1월 17일 2면에는 문태서 의병장 관련 소식 2건을 전하고 있다. 당시는 초창기 신문이어서 전달할 것은 많은데 지면이 부족하여 대개 2~3 문장으로 기사를 전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태익이라는 이름으로 관련 기사를 2개나 실었다는 것은 문태서의 활약을 서울에서도 대단하게 여겼다고 판단할 수 있다. 첫 번째 보도내용은 문태익씨가 덕유산에서 군사를 오랫동안 훈련시켜 무주 구천동에서 일본군과 싸워 일본군을 많이 죽였다는 내용이다.4) 두 번째 보도내용은 14세의 ‘동자의병’에 관한 내용이다. 보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동수동(李童誰童)’ ‘이동’이라는 아이는 어떤 아이? 충청북도 어느 군에 사는 ‘이동(李童)’이라는 어린 아이가 14세의 어린 나이에 스스로 ‘의병’이라 칭하고 옥천, 황간, 영동, 청산 등 여러 지역으로 돌아다니면서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나섰다”고 하였다. 즉시 의병대장 문태익 부대에 합류하여 광주(光州)로 갔다는 소식이 자자하다더라’ 5)한시적 동원1909년 6월에서 10월까지는 문태서 의병부대의 활동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군경이나 대한제국 관리들이 생산해내는 폭도(의병) 관련 문건 수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문태서와 관련된 문건은 불과 4건 뿐이다. 내용도 직접적인 전투나 이동상황 등이 아니라 단순한 수색 또는 정보수집 수준의 문건 뿐이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을까? 1894년 2월에 시작된 동학농민혁명도 농사철 기간인 5월에서 9월까지는 전투행위를 벌이지 않았다. 해당지역 출신들로 구성된 독립된 의병부대들은 총을 잡으면 의병이 되고, 농기구를 잡으면 지역농민이 되는 부대운영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농사철에는 농사를 지어야만 1년을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전투보다는 농사일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이러한 부대 운영원칙이 생겨난 것이다. 해당 기간 중에는 소규모의 의병활동이 있었을 뿐이며 조직관리 및 의병부대원 확보에 더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9년 5월 13일 인근 주민들을 대거 동원하였다.6) 이후 5월 17일에는 무주군 안성면 문성계곡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문태서 선봉장 박춘실부태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이 벌어졌다.7) 문태서는 토벌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군경과 전면전을 벌이기 위해 한시적으로 지역주민들을 동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제징집문태서는 의병 병력 확보를 위해 강제징집을 하지 않고 있다. 당시의 일부 언론과8) 일부 연구자들은 5월 13일에 있었던 지역주민들의 의병 합류를 강제동원으로 보고 있다.9) 하지만 강제동원된 의병부대였다면 불가능했을 여러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문태서 의병부대의 기장은 업정했으며10) 지역주민들은 그의 행적을 칭송하기 위해 공덕비까지 세웠다.11) 오히려 의병활동을 핑계로 지역주민들에게 약탈을 자행하던 의병지도자 유종환을 살해하겠다고 공표하였다.12) 문태서가 강제로 주민들을 의병활동에 참여시켰다면 결코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 다만 지역주민들 중 친일반역행위를 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단순한 물자 운반을 위해 강제노역을 시켰을 것이다.13) 문태서 의병부대 병력 수의 변화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태서는 일본군경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므로 상황에 따라 동원된 병력은 수시로 변했다. 따라서 병력 수로 문태서 의병부대 규모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상황에 따라 유격전과 전면전을 펼쳤기 때문에 일자별로 병력 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문태서가 벌인 전투상황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1)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大韓每日申報 1908년 11월 17일, 「결사동맹」2) 병편Ⅶ (二)五月, 全羅道 高秘 第五三九號7)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4 의병편Ⅶ (二)五月, 全羅道 高秘收 第五五四號8) 한국신문아카이브, 황성신문 『皇城新聞』 1909.6.11. 「潭郡騷擾」9) 이용철, 문태서 의진과 운영성격, 독립기념관. 202210) 한국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 1909.01.30-2면 문태서 부하단속1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3 의병편Ⅵ (三) 三月, 全羅道 高秘收 第三三四號12) 한국사데이터베이스, 統監府文書 6권 一. 憲兵隊機密報告 憲機第七九四號 1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4 의병편Ⅶ (二)五月, 全羅道 高秘收 第四八五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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