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의병부대를 어떻게 구성했을까?
전투 부대 구성은 전투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정규전에 필요한 부대구성 방식과 소규모 지역 전투에 필요한 부대 구성방식은 전혀 다르다. 1907년 7월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조직된 호남지역 의병지도자와 부대들은 일본군경과의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열정만으로 의진을 편성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김동신, 이석용 등의 의병부대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우리나라 군대 편제에 따라 의진을 편성하였다.
선봉장·중군장·좌익장·우익장·후군장 등은 전투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직책이다. 선봉장은 전투 시 가장 앞장서 대적하며, 중군장·좌익장·우익장 등은 상급 지휘관을 가장 가까이서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후군장은 선봉장과는 반대로 부대의 후미를 지키면서 퇴각 시 적의 추격을 저지하는 역할 등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수성장은 점령지 등을 지키는 인물이 맡은 직책인데, 을미의병기 제천의병의 수성장체제를 염두에 놓고 볼 때 단순히 수비만 한 것은 아니고 후방 보급도 담당했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1)
다음으로 군량장은 부대의 보급과 관계된 직책이었다. 지역을 거점으로 활약한 의진들은 기본적으로 군수품을 자체 조달해야 했다. 그만큼 보급이 중요했으므로, 이 시기의 의진들은 대개 이 같은 직책을 두고 있었다. 모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사는 의진의 전략·전술 수립 및 민심 회유와 관계된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2) 마지막으로 ‘유서기’의 사례에서 등장하는 ‘서기’ 직책은 의병장 명의로 간행된 각종 문서를 작성하는 한편 출납까지 담당하는 자리였다.
김동신과 이석용 등은 모두 양반가문의 유생 출신이었다. 일본군경과의 전면전을 목표로 의병을 모았으며,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군대 편제에 따라 의진을 편성하였다. 문태서도 ‘문경수’라는 이름으로 1909년 2월 ‘智理山義兵所大將 文慶秀’ 명의로 발의한 通告文에서는 전통적인 의진을 편성하였다. 하지만 이 통고문은 의병전쟁에서 특별한 의미가 없다. 대체로 1908년 1월 전후로 벌어진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이후 일본군경과의 전면전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의병지도자들 사이에 퍼지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홍순권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군대해산 직후에는 대규모 부대 편제와 대규모의 군사 이동이 오히려 일본군과의 격전에서 많은 희생을 낳았다. 당시 일본군은 밀정 등의 정탐과 전신 등 근대적 통신수단으로 의병들의 동태를 정확하고 신속하게 파악하고 있던 데 반하여, 해산군인 중심의 의병부대들은 주민과의 연계가 끊긴 채 신속한 부대 이동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08년 2월 ‘13도연합의진’의 서울 진공 실패 이후에는 의병들의 전술에도 일정한 변화가 나타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08년 하반기 이후 해산군인과 결합한 호남지역 의병들은 소부대 중심의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히며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전해산 의병부대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전문적인 군사 지식을 갖춘 해산군인의 지도와 협력 하에 의병들은 分陣과 合陣을 전술적으로 활용하고, 여건이 불리한 경우 일시 부대를 해산했다가 적당한 시기 다시 부대를 결성하여 싸우는 방식으로 화력의 면에서의 불리한 여건을 극복해 나가려 애썼다.”3)
문태서 의진에 관한 공식적인 자료는 신편한국사이다. 이 자료에서는 문태서 의진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문태서는 덕유산을 중심으로 1908년 경남 안의에서 의병을 모아 거의하고자 하였다. 그는 먼저 덕유산을 중심으로 수렵을 일삼던 포수 10여 명의 호응을 얻어 덕유산 통도사에 주둔하고 있던 중 일본 헌병 5명이 진안·용담으로부터 무주·안성을 거쳐 무주읍내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들을 추격하여 육박전 끝에 체포 사살하였다. 그 뒤 장수 방면으로 행군하던 중 장수군 계내면 양악에서 朴春實 부대를 만나 그 부대를 흡수하여 합군하게 되면서 순식간에 상당수의 의병을 얻게 되었다.4) 그는 곧 인근에 격문을 발송하고 의병모집의 대의를 밝혀 사람들에게 협력을 호소하였다. 어느 정도의 의병이 모여들자 구체적인 의진을 조직하였다. 그는 자신의 의병진을 호남의병이라 칭하고 스스로 호남의병장이 되었다. 그 진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5)
大 將 文泰瑞 秘 書 朴守文6)先鋒將 朴春實7)中軍將 金誠輔8)後軍將 申託光9)”
위 내용에 나타난 문태수 의진을 증명할 수 있는 추가적인 자료는 발견할 수 없다. 다만 문태수 의병부대 활동을 하다 체포된 여러 사람들의 재판기록에 단편적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오히려 문태서가 벌인 새로운 전투방식인 유격전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은 존재하고 있다. 문태서가 1909년 10월 29일 ‘이원역 소각’을 벌인 이후 일본군경이 문태서 의병부대의 핵심 간부인 강이봉과 길창서를 체포하여 심문하는 과정에서 확보한 ‘적괴 문태서에 대한 검거계획에 관한 건’이다.10) 이 자료에 나타난 문태서 의병부대의 구성과 역할이 문태서 의진 구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 자료에 나타난 35명 이외에 상당한 전투대원이 해당지역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필요에 따라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이 여러 연구자료에 나타난다.
이와 같이 문태서는 일본군경과의 전면전 대신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유격전에 맞게 각 자의 역할을 부여하고 필요에 따라 부대를 구성하여 일본군경과의 전투, 친일부역자 처단, 시설공격 등을 펼쳐나갔다.
1) 을미의병기 제천의병의 수성장체제에 대해서는 구완회의 연구(「제천을미의병의 경제적 기반과 수성장체제」, 『인문사회과학연구』 2. 세명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1995)를 참고할 수 있다.2) 한때 김동신과 같이 활동했던 文泰洙 역시 의진 내에 군량장·모사와 비슷한 ‘軍糧監’ 및 ‘參謀長’·‘參謀士’ 직책을 둔 사실이 확인된다. 이 같은 내용은 문태수가 1909년 2월 ‘智理山義兵所大將 文慶秀’ 명의로 발의한 通告文에 수록되어 있다(국사편찬위원회, 『統監府文書』 9, 1999, 137~138쪽)3) 홍순권, 『한말 일본군의 의병 진압과 의병 전술의 변화 과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5집, 2013. 44쪽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4 의병편Ⅶ (二)五月, 全羅道 高秘 第五三九號5)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신편 한국사 국권회복운동 43 Ⅳ. 항일의병전쟁 3. 정미의병 2) 중부지역의 의병전황 (3) 의병장들의 의병활동 나. 호남의병-전북 (다)문태수 6) 의진 구성 중 비서 박수문은 도선봉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박수문’이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없다. 7)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의병편Ⅶ (二)五月, 全羅道. 高秘收 第五四九號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의병편Ⅶ (一) 四月, 全羅道 100. 高秘收 第四四五號 신편한국사에서 적고 있는 중군장 김성보는 전성범의 한자 오기(金誠輔은 全誠範으로 오기할 수 있음)로서 전성범의 한글 및 한자 이명은 각 종기록에 여러 가지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 자료에서는 문태서의 부장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 직함은 보이지 않는다. 9) 여러 가지 관련 자료에서 신탁광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신명선이 문태부부대에 합류하여 부장으로서 중요하게 활동한 사실이 있다 따라서 실존 신명선을 신탁광으로 해석함이 타당하다. 10)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의병편Ⅹ (二) 二月, 忠淸道 6. 憲機 第四五四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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