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은 예년보다 천천히, 신중히 물들기 시작하네요. 마치 자연이 계절을 지연시키며 무언가 깊은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 여름은 폭염이 지루하고 집요하게 머물렀지요. 끝없는 폭염에 우울증이 걸릴 것 같았습니다. 국화와 장미는 그 영향에 지쳐 기운을 잃었지만, 세월의 흔적을 머금고 피어난 꽃들은 덜 화려함 속에서도 은근한 깊이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비록 지난해보다 향은 옅지만, 그 속에 담긴 계절의 이야기와 시간의 무게는 여전히 매력있습니다. 그 잔잔한 향기를 따라가며, 마침내 햇감을 손에 들고 곶감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감이 풍년입니다. 지난해는 작황이 최악이었지요. 특히 대봉감은 70%가 낙과되어 가격이 두배로 올랐습니다. 올해도 폭염이 끝없이 이어져 작황이 안 좋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단감은 탄저가 들어 30% 수확이 줄었다는데 다행히 곶감용 감은 어려움을 견뎌내었습니다, 곶감용 고종시를 수확하여 저온 창고 가득 저장하는 농부의 마음은 흐뭇합니다. 곶감을 깎기 위해 아침부터 감 선별기를 돌리는데 단단하고 묵직한 감들이 저마다 크기에 따라 나뉘어 갑니다. 큰 감은 올 한 해의 정성과 마음을 담아 선물용으로 준비하고, 작은 감은 실속형으로 포장할 것입니다. 한 해 동안 땀 흘려 가꾼 감들이 이제 손끝에서 선별되고 포장되어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갑니다. 마치 내 손길이 닿을 때마다 이 감들은 저마다의 역할을 부여받고, 새로운 옷을 입고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는 듯합니다. 그 순간마다, 감들 속에 담긴 시간과 기다림이 세상과 소통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피어오릅니다. 올해는 산양삼곶감, 호두말이 곶감, 곶감 인절미 같은 신상품을 다양하게 개발하여 출시할 예정이라 그 안에 담길 정성과 이야기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묵직합니다. 작은 결실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은근한 기대와 희망은 그 자체로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기에, 올해도 감을 깎는 손길에 작은 떨림과 설렘이 함께합니다. 가을은 아직 온기 가득하지만, 머지않아 겨울의 찬 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그 추위에 맞서기 위해 마당 한편에 장작을 가득 쌓아두었습니다. 마치 겨울의 공격에 대비한 성벽처럼 든든히 쌓인 장작 더미는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자연에 맞서 하나의 방어선을 구축한 듯한 안정감을 줍니다. 겨울이란 결국 시간을 견디며 맞서는 과정이며, 그 과정 속에서 자신만의 성을 쌓아가는 것이 삶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곶감 작업이 아무리 바빠도 정원에 남은 구근들은 갈무리해야 합니다. 여름의 폭염과 잡초와의 싸움 속에서 반타작에 그친 텃밭은 실패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도 작은 씨앗들이 남아 다가올 계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삽질을 하다 흙 속에서 고구마 대신 억센 잡초 뿌리만 만났을 때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지만, 그 순간조차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듯 농사의 손길은 실패와 성취, 그 긴장의 경계를 오가며, 삶의 순환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올겨울에도 마음속에 봄을 기다리는 씨앗을 심으며, 언젠가 필 수 있는 가능성에 기대어 새로운 계절을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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