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12회까지에서 함양출신 ‘호남의병대장 문태서’의 탄생과 등장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지금까지의 연재를 살펴보면서 ‘이렇게 대단한 의병대장 문태서는 어떻게 싸웠을까?’라는 질문을 가져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대한제국 말기였던 1907년 하반기부터 일제에 나라를 강제로 빼앗긴 19010년 상반기까지 4년 이상 덕유산을 근거지로 ‘덕유산 호랑이’의 용맹을 휘날렸던 문태서와 그 의병부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남부 각지를 종횡무진하며 일본군경과 의병전쟁을 활발하게 벌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찾아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질문을 바탕으로 문태서가 싸웠던 상대, 의병을 일으킨 시점, 의병부대 구성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문태수의 의진 운영 방식을 살펴보고, 실제 의진에 참여했던 부하들의 면면을 살펴봄으로써 의병장 문태수의 활약상을 좀 더 입체적으로 파악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일본통감부 내무부 경무국에서 작성한 『暴徒에 關한 編柵』, 통감부 자체문서 『統監府文書』, 의병들의 재판기록인 『判決文』,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주차군이 기록한 『폭도 봉기의 건』 등을 검토하고자 한다. 『暴徒에 關한 編柵』, 『統監府文書』, 『폭도 봉기의 건』에는 일본군경이 의병들을 학살했던 상황들이 보고서와 전보 등 다양한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서 문태수 의진을 살펴볼 수 있다. 문태서 의병부대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의병들에 대한『判決文』은 전주법원의 자료가 대부분이며, 경상남북도, 충청남북도의 의병에 관한 판결문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전주법원의 자료만으로도 문태수 의진의 구성을 살펴보는데 유용하다. 누구와 싸웠을까?문태서가 벌인 의병전쟁에서 가장 뚜렷한 적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앗으려고 하는 일본제국주의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군부는 대한제국의 허락없이 강제로 한국에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이라는 이름으로 일본군을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주차수비대, 주차헌병대, 주차사령부, 예하부대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주차수비대는 전국 주요 기초 행정조직에 ‘수비대’를 설치하고 나머지 기초행정조직에 ‘수비분견대’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일본의 정통 관료출신인 이토오 히로부미는 일본군부의 한국통치를 견제하고자 ‘헌병대’를 설치하게 된다. 본래 일본의 헌병은 창설 당시부터 기본적인 군사경찰권 외에 행정 경찰, 사법경찰이라고 하는 보통경찰권도 그 권한으로 부여되어 있었다. 즉 “헌병이란 ‘군사경찰권 및 보통경찰권을 집행할 자격을 가진 군인’이었고, 헌병대란 헌병과 군인을 주체로 편성된 군대로, 경찰권을 집행하는 기관”이라고 정의되어 있었다. 특히 주한일본군헌병대는 군사경찰권보다 보통경찰권의 행사가 중시되어, 군대조직이면서도 경찰기관으로서 통감의 지휘 하에 있었던 것이 특징이었다. ‘수비대’와 ‘헌병대’의 차이점은 한국주둔 일본군 사령관의 지휘를 받느냐, 한국통감부 통감의 지휘를 받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이후 이토오 히로부미는 외국의 시선을 의식해 추가로 내무부 경찰국을 신설하고 지방경찰청을 설립하여 경찰조직을 완성하게 된다.1)
그러나 눈에 보이는 일본 군경들보다 더 심한 자들이 일진회, 경찰보조원 및 헌병보조원이었다. 이들은 같은 민족으로서 일제의 한국 침략에 신념으로 동조했거나,2) 현실적인 이익 때문에 부역했거나,3)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던 재한일본인이었다. 한국헌병보조원은 1908년 6월 11일「칙령 제31호」‘헌병보조원 모집에 관한 건’이 공포되면서 대거 채용되었다. 헌병보조원은 조선인 해산 군인 출신 이거나 혹은 의병 귀순자들, 분견소가 있는 친일 조선인들로 채워졌고, 주로 일본인 헌병대의 수족 노릇을 하였다. 문태서는 이외에도 세금징수원과4) 의병을 사칭하는 도적들5)6) 등도 처단의 대상으로 보았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하여 각 종 교통시설을 건설하였으며, 이 일에 한국인들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전국 각지를 연결하는 전화통신망을 구축하였으며, 주요 문서를 전달하기 위해 우체국을 중심으로 하는 우편망을 확충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수물자 확보를 위해 세금이라는 이름으로 강탈을 자행하였으며, 이를 위해 세무서를 설치하였다. 문태서는 일본의 한국침략에 사용되고 있는 교통시설, 통신시설, 행정시설 일체를 적으로 보고 파괴, 약탈, 방화 등을 벌여나갔다.7)문태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언제부터 싸웠을까?문태서가 의병을 일으킨 시기(이하 거병시기)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마다 서로 의견이 다르다. 문태서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지역 향토사가 김성진은 문태서가 1908년 2월 배포한 격문 ‘행우창의소 문태서격문’과 무주군 안성면에서 문태서를 연구해온 김철수가 쓴 ‘문태서전(文泰瑞傳)8)을 근거로 1906년에 의병을 일으켰다고 주장하고 있다.9) 국가보훈처는 2008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문태서를 선정하면서 배포한 관련자료에서 거병시기와 장소를 1906년 봄, 무주군 안성면 원통사로 밝히고 있다.10)
문태서가 의병을 일으킨 시기를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로 보는 견해도 많이 있다. 황현은 그의 문집 ‘梅泉野錄’에서 문태서가 1907년 6월 이후에 의병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11) ‘폭도에 관한 편책’에서 문태서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김동신 의병장과 함께 하고 있는 기록이 처음 나타난 시기가 1908년 1월 초이다.12) 김동신이 순창읍을 습격하여 일본군경과 전투를 벌인 후 함양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1907년 9월 7일자 황성신문 및 10월 5일자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문태서의 이름으로 벌인 최초의 전투 기록도 1908년 3월이다. 이용철도 ‘의병장 문태수의 생애와 항일투쟁’에서 1907년 7월을 전후로 의병활동을 본격화하였다고 판단하고 있다.13) 많은 관련자료와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찾을 수 있는 각 종 관련 자료를 검색한 결과 연구자는 문태서의 거병시기를 1907년 하반기로 판단하고 있다.
1) 홍순권, 「한말 일본군의 의병 진압과 친일세력의 역할」, 『역사교육논집』 58, 역사교육학2) 나무위키, ‘1894년 동학세력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고종이 청에 차병을 요청하자 일본이 끼어들어 같이 군사를 파견하였고, 이후 조선에선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동학파는 반란의 패배 이후 외국혐오를 포기하고 외국의 ’문명‘에 마음을 열게 되었다. 개종한 동학파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지지했는데, 당시엔 안중근 의사도 일본을 지지하였다. 동학파는 1904년에 진보회를 조직하고 일진회와 합병을 발표하고 후자의 이름으로 단결했다. 일진회의 규모는 10만 명 이상이었다. 이것은 당시에 대단한 규모였다. 매일신보라는 신문에는 일진회 회원들이 총 140,725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외로 삼남 지역보다 이북 지역의 회원수가 훨씬 더 많은 것으로 나온다. 이들은 농민, 무산자, 부농, 상인, 지방 사족 등 학계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비기득권 세력이었다. 일진회의 회원들은 극단적인 단발사상을 가졌다. 이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에 손대는 행위 유교적 금기를 위반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일진회 회원들은 새로운 문명을 목표로 선정적인 발언으로 선동하였다. 일진회(친일단체) - 나무위키3) 위키백과, 헌병보조원 제도가 시행된 것은 1907년 7월 1일부터였다. 당시 대한제국에는 군대해산등 한일 신협약 등으로 많은 의병들이 봉기를 했었으며, 한국 주재 일본 헌병대는 7~800여명 정도였고, 이 숫자로는 의병진압 등 활동에 투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병 진압, 탄압하기 위해서 기존의 7천명 가량의 인원을 확보하고 의병진압에 투입되던 집단하나가 해체되기도 했기에 헌병대를 증원하여 그 공백을 메울 필요가 있었다. 이에 1907년 말까지 일본에서 증원부대가 도착, 헌병의 수는 2천명에 달했고, 그 외에 4천여명의 한국인 헌병보조원을 모집, 채용하여 1908년에는 약 6천여명의 인원을 채용하게 된다. 이후 의병진압, 탄압할 목적으로 증원되었다. 이 제도를 제의한 것은 당시 대한제국 총리였던 이완용이었으며, 매일 일본 제국의 장군 하세가와 요시미치대장을 찾아가서 의병의 진압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논의중 고안해낸 수단이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헌병보조원’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 9 병편Ⅱ (三) 三月, 慶尙道, 步兵第一二旅團司令部守發 第八三號 외5)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박동식 판결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 의병항쟁재판기록, 판결 융희 3년 형(刑) 제164호. 중 ‘피고는 전기(前記)의 횡행 중, 융희 2년 1월 일자미상에 부하 성명미상의 모(某) 외 13명이 수괴의 명을 따르지 아니하고 민재(民財)를 약탈하였다 하여 수괴 문태서와 협의하고 함께 조의(造意)하여 그 부하를 명하여 그 중 9명은 전라북도 금산·용담, 충청북도 금산, 충청북도 황간(黃澗)·영동(永同) 등 각 지방에서 총 및 칼로써 살해하였던 것이다.’6) 한국사데이터베이스, 統監府文書 6권 一. 憲兵隊機密報告, 憲機第七九四號7)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 13 의병편Ⅵ (三) 三月, 慶尙道, 慶秘收 第二○一號의 一8) 김철수는 1950년대에 무주, 장수, 함양, 거창 등지에서 문태서보다 두 살 아래에서 서른 살 아래에까지 이르는 의병 생존자 10여명이 증언한 내용과 자신이 들은 내용을 전기형식으로 정리하였다. 증언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증언자들의 성명, 나이, 주소 등을 첨부하였다. 9) 김성진, 『항일의병장 문태서 연구』, 함양문화원, 2019,105쪽10) 보훈처, 『2월의 독립운동가 문태수』,2008.11) 황현 저.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료총서 1:매천야록』, 국사편찬위원회 1971, 483. ‘全羅南北道義兵起。六月以來, 關嶺義兵日熾, 獨湖南無之, 人爲湖南羞之。至是, 李錫庸起任實, 金泰元起咸平, 奇三衍起長城, 文泰洙起茂朱, 高光洵起同福, 一時風動。然無資裝, 無紀律, 不敢搏倭血戰, 惟作形勢, 擾之而已。泰元, 多奇略, 前後斬馘甚多, 泰洙, 善拊御, 往來湖嶺 間, 甚得民心, 民相與匿之。錫庸, 往來飄忽, 倭懸像購之, 而終不獲。光洵, 入智異山敗死。’12)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의병편Ⅰ (一) 一月, 全羅道 8. 南秘發 第九號13) 이용철, 『의병장 문태수 생애와 항일투쟁』,군사연구총서제10집,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22,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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