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적으로 백석 시집을 다시 펼치는 때가 있다. 가수 김창완의 “우리가 너무 멀리 온 것은 아닐까. 선풍기, 부채만으로도 거뜬히 여름을 났는데” 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문득 ‘멀리 오기 전의 날’들을 곰곰 생각하다가 내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1938년-1948년)을 시로 엮은 <정본 백석 시집>까지 떠올리던 것이다. 백석의 시에는 단번에 해석할 수 없는 고어와 방언들이 많았지만 문맥만으로도 아련한 그때, 그곳을 상상하게 하면서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살아가는 향수를 안기며 우리를 그 시절로 데려간다.
백석의 시가 아니었으면 그 멀리 떨어져있는 날들, 그곳의 사람들, 그때의 삶과 생각들을 어떻게 알 수 있겠으며 시로 배열된 미묘한 정서를 어떻게 느낄 수 있겠는가. 주석이 없었으면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던 제목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시인의 그 시절, 어떤 한때의 마음이 그때와 다른 시절을 사는 지금의 독자들에게도 동일시의 감정을 느끼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우난골족”의 북적북적함은 그 시대를 지나 지금까지 이어져 온 명절의 풍경이라 그다지 낯설지가 않지만 지금은 그 북적거림이 사라졌거나 사라지는 중이라 이때가 지나면 그 북적거림도 백석의 시처럼 어떤 문장의 한 귀퉁이에 붙박이게 될 것이다.
너무 멀리 온 세대가 있고, 얼마 간 멀리 지나 온 세대가 있고, 가까이 지나 온 세대가 있고 현재와 딱 붙어있는 어린 세대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체감하는 세상은 각자 다르다. 문학과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 아득히 먼 시절을 보고 읽고 듣지만 동일한 내용일지라도 살아 온 세월에 따라 각자의 시각과 해석이 다르다. 같은 시대를 살아 온 동년배 일지라도 세상을 읽는 방식이 다르고 놓인 환경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가치관과 사회의식과 인식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의 갈등 요인이 되는 요소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은 시간에 엮여 면면히 내려온다. 현대를 살면서도 신화와 역사를 통해 먼 과거를 들여다보며 태초의 인간에 대해 쓰는 사람이 있고, 인간의 족적과 투쟁과 역사를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직 당도하지도 않은 미래의 인간사회를 SF적인 상상을 발휘하여 보여주기도 하고 예고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인간의 삶이 있다는 것을 여러 장르의 매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문명이란 동시다발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곳은 너무 빠르게, 어떤 곳은 느리게 또 어떤 곳은 당도하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그저 그런 일상을 살면서 백석의 여우난골족을 읽고 첨단미래산업의 주자인 AI와 친밀해진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혼재되어 있는 삶을 살면서 누군가는 너무 멀리 왔다고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때가 지척 같다고 말한다. 어찌됐든 가끔은 너무 멀리있는 어떤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그럴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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