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쓰는 말은 모조리 배달겨레의 말이라고 생각하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입말에 토박이말과 중국말, 일본말, 서양말이 뒤섞여도 우리가 쓰면 우리말이고 글말에 한글과 한자, 로마자가 뒤섞여도 우리가 쓰면 우리말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의 말을 함부로 끌어들여 뒤섞어 쓰면 제 겨레의 삶으로 빚어낸 느낌과 생각과 뜻을 싸잡은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제 겨레의 삶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는 남의 말을 함부로 끌어들여 쓰면 겨레의 삶을 어지럽히고 흐트러뜨리게 됩니다. 그리고 겨레 동아리 안에서 서로 주고받는 말을 누구는 알아듣고 누구는 알아듣지 못하게 되면 그런 말은 머지않아 동아리를 갈라놓거나 망가뜨리게 마련입니다. 알아듣는 사람은 못 알아듣는 사람에게 말을 하고 싶지 않고 못 알아듣는 사람은 또 알아듣는 사람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들은 하나의 동아리를 이루어 살아갈 수 없기에 서로 갈라서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 뼈아픈 것은 지식인·지도층이 뒤섞어 쓰는 외국말은 높고 값진 말이고 뭇사람들이 아끼며 쓰는 토박이말은 낮고 하찮은 말이라는 생각이 시간이 갈수록 굳어진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나브로 토박이말은 내버려야 할 쓰레기가 되어 쫓겨나고 외국말은 아끼고 가꾸어야 할 보물이 되어 우리의 안방으로 밀고 들어왔습니다. 일반 백성의 삶이 서러웠던 것처럼 토박이말의 신세 또한 서러움에 젖어 눈물겹게 되어 버렸습니다.
오래전에 저의 큰 스승 빗방울 김수업 교수가 쓴 ‘우리말은 서럽다’를 꺼내서 읽고 또 읽어 보았습니다. 책을 펼치면 곧바로 ‘사람에게 가장 몹쓸 병’이라는 소제목이 등장합니다. 거기에 ‘사람에게 가장 몹쓸 병은 제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병이다.’라는 문장이 글 첫머리에 나옵니다. 선생은 이 병이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보다 더 무서운 병이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저는 이 한마디만 가슴에 새겨 살아갈 수 있다고 해도 이 책을 읽은 보람과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에서 받은 느낌과 생각을 구구절절 다 이야기할 수는 없어도 ‘말이 곧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소제목이 달린 많은 글 가운데 제 머리를 쿵 때리며 가슴을 찌릿하게 만든 몇몇 글입니다.
‘할말’과 ‘못할말’을 얘기하면서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말은 ‘못할말’이고 사람 사이를 아우르는 말은 ‘할말’이라 뜻매김한 것은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고맙다’라는 토박이말이 ‘당신은 나에게 목숨을 내주고 삶과 죽음까지 이끄시는 곰(서낭)과 같은 분이다’라고까지 추적해 밝혀낸 것은 탁견이라 할 만합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미신이라 치부하던 ‘굿’의 의미를 다시 새긴 것도 신선했습니다. ‘깨닫다’라는 의미가 ‘흐리고 멍청하던 삶에서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 맑고 또렷한 본살의 삶으로 건너와서 곧장 삶의 과녁을 겨냥하여 내달린다.’로 ‘사람’의 의미가 ‘삶을 아는 것’으로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어떤 삶이 보람차고 헛된지를 알고, 무엇이 값진 삶이며 무엇이 싸구려 삶인지를 알고서 살아가는 목숨을 ‘사람’이라고 풀이한 것은 치밀한 성찰 없이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의미 부여라 하겠습니다. 이 외에도 이 책 속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잘못 써 오던 평범한 낱말들을 추적하여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의미를 밝혀 제자리에 돌려놓고 있습니다.
비록 하찮은 것 일지라도 우리 것을 애써 찾아 그것을 빛나게 할 때 우리의 자존감도 더불어 높아진다는 것은 역사와 문화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 겨레는 여느 겨레 못지않은 뜻깊은 우리말인 한국어(배달말)가 있고, 여기에다가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과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한글(배달글자)’이라는 문자 도구까지 가졌으니 더 무엇을 부러워하고 두려워하겠습니까! 바르고 곱고 아름다운 배달겨레말로 남들이 따를 수 없는 우리의 삶을 꽃피워 세상 모든 겨레를 도우면서 값지고 복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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