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지난 10회에서는 ‘영각사전투’와 관련된 일본군 한국주차군의 기록1)과 경찰측 기록인 거창경찰분견소 소장의 보고서2)의 내용과 사진자료를 확인하였다. 11회에서는 ‘영각사전투’ 내용을 사실적으로 해석해 보았다. 문태서라는 공개된 이름으로 일본군경과 벌인 대규모 전투였으며, 덕유산 주변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규모의 전투가 연이어 벌어졌기 때문에 이 모든 전투를 묶어서 바라보면 ‘의병전쟁’이라고 불러야 할 충분한 가치를 가진 역사적 사건이다. 13도 창의군은 1908년 1월 서울에 주재 중인 각국 대사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합법적인 교전단체로 여겨줄 것, 즉 교전권을 인정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다시 말해 일본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영각사전투’를 비롯하여 1908년 3월에 덕유산을 중심으로 한 인근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는 이 선전포고에 따라 진행된 ‘의병전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태서에 관하여 지금까지 연구한 자료들이나 책들 중에서 ‘영각사전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검토한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3)4) 그 까닭은 ‘영각사전투’를 전후한 덕유산 주변의 의병들의 조직과 활동을 연결시켜보려는 종합적인 통찰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덕유산을 근거지로 하고 있던 당시의 의병부대상황, 조직체계, 전투일지 등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덕유산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던 의병부대들황현은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 김동신은 기우만, 고광순(高光洵)과 함께 정미의병기 전라도 의병의 효시로 보았으며5), 실제 그는 한때 1,000명가량의 부하를 거느렸을 정도로 명망과 실력을 겸비한 의병장이었다6). 김동신은 1907년 하반기부터 지리산과 덕유산을 잇는 백두대간을 근거지로 하여 전라남북도, 경상남도 3도에 걸쳐 있는 해당지역을 의병들의 세력권으로 두고 활발하게 의병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1907년 8월에 호남의병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김동신은 이러한 활발한 의병전투의 결과물을 바탕으로 ‘삼남의병도대장(三南義兵都大將)’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었다.7) 김동신과 관련된 기록에서는 호칭이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었음을 6회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이러한 호칭은 당시 부근에서 활동하고 있던 소규모 의병부대를 이끌고 있던 의병장들에게 상당한 권위와 통솔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김동신은 1908년 2월을 전후하여 지리산 부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으며, 1908년 2월 1일 밤을 기해서는 구례주재소 습격을 공언할 정도였다8). 김동신 의병부대의 활동이 거세어질수록 일제의 탄압도 증가되었다.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한국주차군 남부수비대 국지(菊地) 연대장의 명에 의해 함양·남원·구례·하동·진주의 각 부대들이 합동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9)10). 각 부대는 지리산 정찰을 마치고 18일 하동군 화개면 신흥(新興)에 회합했지만 김동신의 추격에는 실패하였으며, 김동신이 부하들과 근거지를 이전한 것으로 판단하고 30일 철수하였다11).
김동신은 지리산이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경에 포위되자 근거지를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깊은 산악지대이자 충청남북도, 경상남북도, 전라북도의 경계지역인 덕유산 부근으로 옮겼으며12). 3월 중순에는 다시 연합의진을 꾸려 일제에 맞섰다. 이 무렵 김동신은 4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문대서(文大西)’ 이하 60명, 유모(柳某) 이하 70명, 신모(申某) 이하 40명과 함께 ‘폭도’ 집단을 만들어 무주군 안성면에 주둔하다가 경상도로 이동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13)14). 그리고 김동신은 체포된 이후 심문조서에서 자신의 휘하에 있는 주요 장수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15)피고인 김동신 제3회 청취서(被告人 金東臣 第三回 聽取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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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9명이 책중(責重)한 자(者)요 기타(其他)는 의신(矣身)이 직접 지휘하지 않아 알 수 없다.문 지금 말한 유종환(兪鍾煥)은 현재 병력이 얼마이며 어디에 있는가?답 유종환(兪鍾煥)은 일백여명을 데리고 전라북도 무주 부근에 머무르고 있다.16)문 문태익(文泰翌)은? (문태서의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있음)답 문태익(文泰翌)은 이백명을 데리고 전라북도 무주 부근에 머무르고 있다.17)문 최창근(崔昌根)은? 최창근은 오십명 가량을 데리고 있으나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문 문성길(文成吉)은? 문성길은 차은표와 같이 오백명을 데리고 경상북도 성주에 있다. 문 오대근(吳大根)은? 오대근은 30명 가량 데리고 경상남도 거창군에 있다. 문 국인묵(國仁黙)은? 국인묵은 임병주와 같이 일천명을 데리고 전라도 순창과 담양에 있다.
‘영각사전투’를 비롯한 1908년 3월 전후로 덕유산 부근에서 벌어진 대규모 의병전쟁한국독립운동사연표에 의하면 1908년 3월 전후로 덕유산 부근에서 의병 50명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의병전투는 다음과 같다. (표 참고)
덕유산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던 의병부대들은 농사일이 시작되기 전인 3월을 전후로 일본군경과 맹렬한 전투를 벌였으며, 이 전투들은 각 지역단위 의병부대들을 지휘할 수 있는 지도부가 존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동신을 중심으로 한 문태서, 유종환 등 각 지역 의병장들은 해당지역에서 지도부의 작전에 따라 활발하게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8)
그리고 지역 의병부대들의 활동은 해당 지역 관청, 경찰시설, 우체국 등 시설파괴와 행정조직 공격, 친일파 처단, 일본군 수비대 습격 등 대개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이로 인해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일본 군경들은 숫적으로 불리할 수 밖에 없었으며, 후에 대대적인 의병 토벌계획을 수립하게 된다.19)
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9 : 의병편Ⅱ (三) 三月, 全羅道, 步兵第一二旅團司 令部守發 第八四號2) 공훈사료관, 원문사료실, 폭도에 관한 편책 융희 2년 3월(경남북. 전남북. 충남북도) 1 00193) 이철용, 『의병장 문태수의 생애와 항일투쟁』,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22, p168, 표1 1908년 문태수의 행적4) 김성진, 『항일의병대장 문태서 연구』, 함양문화원, 2019. p 614, 부록 문태서 의병 중요 일지 1908년 3월분5) 황현 매천야록 隆熙 元年 丁未(續)(1907년), 26. 호남지방의 의병 봉기6)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의병편Ⅳ (二) 六月, 忠淸道, 大警發 秘 第三七號 김동신 심문조서 7) 김동신, 『김동신문집』, 1906.06 ~ 1912.12 일기체, p227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의병편Ⅱ (二) 二月, 全羅道 『光秘收 第八八號』9)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의병편Ⅱ (二) 二月, 全羅道 『南秘發 第四四號』10)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의병편Ⅱ (二) 二月, 全羅道 『光秘收 第一一五號』1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의병편Ⅱ (二) 二月, 慶尙道 『居秘收發 第六六九號』12)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의병편Ⅱ (一) 一月, 全羅道 『錦警發 第四○號』1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의병편Ⅲ (一) 三月, 慶尙道 『步兵 第十二旅團司令 部 守 發 第八九號』14) 원문의 문대서는 문태서 오기로 추정, 유종한으로 추정, 신탁광으로 추정 - 대규모 전투를 위하여 연합부대를 꾸렸음을 보여준다. 이 부분 역시 문태서 의병부대는 30~40명 단위의 소부대로 행동하고 있으며, 사안에 따라 연합작전을 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동신을 중심 으로 문태서 유종한 신탁광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의병편Ⅳ (二) 六月, 忠淸道 『大警發 秘 第三七號』16) 유종환은 백명의 부대를 이끌면서 덕유산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다는 표현이다.17) 문태서가 가장 많은 의병을 이끌고 있으며, 역시 덕유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의병편Ⅳ (二) 六月, 忠淸道 『大警發 秘 第三七號』19) 한국사데이터베이스, 統監府文書 9권 一○. 南韓大討伐實施計劃其他 (1) 남한 대토벌 실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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