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우리나라의 모든 치안권을 장악하였으며, 조선인 헌벙보조원을 모집하여 하수인으로 삼았다. 이들은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의병전쟁에 나선 사람들을 폭도로 간주하였으며, 이와 관련된 활동내용을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이 자료가 ‘폭도 토벌에 관한 편책’이다. 이 자료에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활동내용이 일본의 입장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문태서가 공식문건에 처음 나타난 것은 1908년 3월 중순이었다. 우리가 주변으로부터 들었던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공식문건에 나타난 기록만으로도 많은 내용을 찾아낼 수 있다.
1908년 1월 21일 금산경찰서 관내 무주순사주재소 순사와 일본헌병 영동수비대가 무주군 안성면에 의병출몰 상황을 확인하기 위하여 갔다. 이 상황을 금산경찰서장이 서울의 일본인 경무국장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1)(중략) 土人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本月 二十日 午後 八時頃 安城 二安面市場에 暴徒 四十名의 一行과 三十名의 一行이 와서 村民에 酒食의 提供을 命하고 飮食한 뒤 그 代價도 支拂하지 않고 一安面 方面으로 進行하였는데 그 賊姓은 文太守 金東臣의 兩名이며 火繩統 五十挺餘와 洋銃 十挺餘를 所持하고 土人에 대해 日本人 性來의 有無을 물었다는 것2)을 探知하였으므로 偵察隊의 一行은 同月 二十一日 이를 追跡하였으나 追及하지 못하고 賊은 二安面 市場에서 食事後 一二時間 休息하고 그로부터 安城 一安面 三公里에서 德裕山을 넘어 慶尙南道 安義地方으로 向해 遁逃한 形跡이 있으나 별로 民家에 損害를 끼친 모양은 없다.(중략)이 보고서는 문태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 몇 줄만 가지고도 않은 내용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이 보고서 내용을 문장 단위로 자세히 분석해 보고자 한다. 1.덕유산을 근거지로 하고 있는 문태서 의병부대‘주민들에게 들은 바는 1월 20일 오후 8시경 안성 이안면(안성면 소재지) 시장에 의병 사십명의 일행과 30명의 일행이 와서 민가에서 술과 식사를 달라고 해서 먹고 마신 후...’
현 무주군 안성면은 당시 무주군 일안면(현 안성면 공정리, 죽천리, 공진리)과 무주군 이안면 (현 안성면 사전리 금평리 덕산리 장기리) 및 유가면 일부(안성면 진도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역을 당시에는 민간인들이 안성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해당 지역 내 이안면은 안성의 중심으로 정기적인 장이 서는 곳이었다. 인근 진안, 무주, 장수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장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큰 시장이다. 3월 20일 안성지역 이안면 장날 오후 8시 장이 모두 끝났을 무렵 두 무리의 의병부대가 연이어 장터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장터 주위에서, 70명 이상이 되는 의병부대들이 술과 밥을 청해서 먹었다. 강탈해서 먹었을까? 대가를 지불하고 먹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계속되는 글에서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일본 경찰과 헌병들은 이 사실을 다음날 알고 이안면으로 출동하였다. ‘...일안면(현 구천동) 방면으로 향하였다. 그 폭도들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문태수와 김동신 2명이었다’
의병부대의 지휘자를 문태서, 김동신으로 특정하여 기록하고 있다. 김동신은 충남(忠南) 회덕군(懷德郡) 출신으로 1906년3월 26일 홍주(洪州)에서 기병한 민종식(閔宗植)의 부하로 들어가 그 선봉장이 되었다. 1907년 9월 10일 김동신은 80명의 의병을 이끌고 순창(淳昌)의 우편취급소와 경무고문분파소(警務顧問分派所)를 습격하여 이곳을 점령한 후 이곳 관물을 노획하였다. 김동신의 순창 전투는 이해 9월 15일 고광순의 동복(同福) 순사주재소 습격과 더불어 군대해산 후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에 있어서의 의병봉기의 선구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미 1907년부터 전라도 지역의 의병장으로 맹활약하고 있던 김동신과 함께 행동하고 있는 의병장 문태서가 처음으로 일본 공식문서에 등장하였다. 일본경찰은 문태서를 먼저 언급하고 김동신을 뒤에 언급한 것으로 보아 문태서가 더 중요한 의병지도자라고 판단한 것 같다.‘화승총 오십여정과 서양신식총 십정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지역민들에게 일본인들의 활동상황을 물었다’
안성장에 나타난 의병들은 약 70여명 정도이다. 화승총 50여정과 서양 신식총 10정 등 모두 60정이면 의병들 대부분 총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화승총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총격전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무장을 한 부대였다. 그리고 지역민들에게 일본인들의 활동상황을 수집했다는 것은 이 지역에서 실질적으로 행정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지난 7회에서 김동신과 문태서는 강력한 소총부대를 운영하고 있었다고 밝혔으며, 문태서는 이러한 소총부대를 이끌고 호남의병을 대표하여 ‘13도 창의군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하였다고 적었다. 이러한 실질적인 증거가 이 보고서이다. ‘이러한 정보를 파악하고 정찰대 일행은 3월 21일 이를 추적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였으며, 폭도들은 이안면 시장에서 식사후 한 두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고 일안면 삼공리에서 덕유산을 넘어 경상남도 안의지방으로 향해 도주한 흔적이 있으나 민가에 피해를 끼친 흔적은 거의 없다’
안성장에서 술과 밥을 청하여 먹고 마신 후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갔다는 기록과 민가에 피해를 끼친 흔적은 거의 없다는 기록은 서로 맞지 않다. 1909년 4월 안성지역 두 곳에 지역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의병대장 문태서장군 송덕비를 건립하였다.3) 일본경찰의 기록에는 문태서의 활동은 지역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음이 자주 나타난다. 안성장에서 술과 밥을 청해서 먹고 마신 후 2시간 정도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은 해당 지역이 문태서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 하루 늦게 보고되었다는 것은 일본의 치안력이 안성지역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기록에 나타난 일안면 삼공리는 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로 일본경찰이 현장 답사없이 추측하여 보고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안성면과 설천면은 덕유산 정상인 향적봉을 중심으로 서로 반대방향에 있기 때문에 일본 정찰병들이 쉽게 움직일 수 없는 곳이다. 일본 경찰이 삼공리에서 덕유산을 넘어 안의지방으로 도주하였고 적은 까닭은 문태서 의병부대가 덕유산 깊은 골짜기(현 거창군 북상면 월성계곡으로 추정)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2.안성지방에서는 일본경찰을 지원하는 자위단이 활동하고 있었다.‘안성지방의 자위단은 규약을 실행하여 마을 변두리에 파수처를 설치하고 때때로 순찰하고 있는데 이번 정찰대의 일행이 그 지역에 도착하자 폭도들에 관한 사항을 빠짐없이 보고하였다’
당시에는 금산군에 속해 있던 무주군 안성지역을 관할하고 있던 치안조직은 경찰, 헌병, 토벌대 등이 있었다. 하지만 문태서 의병부대를 비롯한 여러 의병부대가 덕유산을 근거로 활동하면서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비록 일본경찰조직이 행정적으로 활동하고 있기는 했지만 금산읍에 주둔하고 있는 경찰분소와 무주지역에 있는 무주순사주재소 인력 및 헌병보조원 등으로는 의병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일본경찰이 조직해 놓은 자위단은 형식적으로 활동할 수 밖에 없었고, 의병들도 이들을 적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자위단들이 일본경찰에게 의병들에 관한 사항을 모두 보고하였다고 하였으나 극히 형식적이었을 것이다. 3. 무주군 안성면 주변 산사를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안성 일안면 구천동 산사와 이안면 사탄리 산사(두 절은 인가에서 2리(800m)이상 떨어진 깊은 산골에 있다.)에 들러 폭도들이 다녀간 상황을 물었으나 전에는 가끔씩 이곳에 나타나 머무러고 간 적이 있으나 최근에는 나타난 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안성 일안면은 현재 무주군 설천면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구천동계곡이 포함된 설천면 삼공리도 일안면에 속해 있었다. 구천동에서 유명하고 오래된 절은 백련사이다. 이안면은 현재 무주군 안성면 소재지로서 칠연계곡이 길게 펼쳐져 있으며 계곡의 막다른 곳에 원통사가 있다. 두 절은 덕유산 향적봉을 중심으로 서로 반대편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지만 거리상으로는 멀지 않다. 다만 지형을 알지 못하는 일본경찰에게는 매우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다. 덕유산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월성계곡에 문태서 장군의 의병부대가 본거지를 마련하여 충청남북도, 경상남북도, 전라북도 경계를 넘나들면서 활발한 의병전쟁을 벌였다. 산사에 들러서 의병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자 하였지만 그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리 없었을 것이며, 그 까닭에 이렇게 기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9 의병편Ⅱ (一) 一月, 全羅道. 錦警發 第四○號 2) 문태서는 1098년초부터 김동신과 함께 행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신식총을 구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 의병편Ⅵ (三) 三月, 全羅道, 高秘收 第三三四號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