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고향은 출신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같은 하늘 아래 공기부터 다르게 느껴지는 시간의 무게로 잠깐 낯설다가도 곧바로 안정감을 느끼는 마음의 공간이다. 일자리를 찾아, 원대한 꿈을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 각지를 떠돌며 밤낮없이 일에 매달릴 때에도 떠올리면 따뜻하고 언제나 그리운 곳이 고향일 것이다. 이처럼 여전히 고향 함양을 그리며 살아가는 향우들이 전국 곳곳에 있다. 주간함양은 매달 한 편씩 연재되는 ‘함양 향우를 찾아서’ 특집을 통해 각지에 있는 고향 향우들을 만나 끈끈한 정을 느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베풀고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정말 컸었던 故박경호 선생   교육 불모지 지역 학생들이 안심하고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까지는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함양군에도 교육의 밑거름을 강조하며 지역 교육발전에 기여한 이들이 많다. 이러한 손길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절실하기 마련이다. 아이들이 점점 줄어가는 시골 마을 학교일수록 더 그렇다. 지리산을 끼고 있는 마천에는 원방장학회가 큰 뒷받침 역할을 해왔다. 마천 음정마을 출신인 故박경호(1930~2015) 선생은 고향 마천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2008년 거금 10억원을 출연했고 이 재원을 바탕으로 2010년 원방장학회가 설립됐다. 장학 재단에서는 출연금의 이자 수입으로 마천초등학교, 마천중학교 출신 재학생 및 진학자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고 또 부모의 본적이 마천인 서울대학교·포항공과대학교·카이스트 입학생 및 전국대회 입상 예·체능계 특기생에게는 특별장학금을 지급해왔다. 스키캠프나 필리핀 어학연수 등도 지원하며, 관내 어려운 학생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있다. 故박경호 선생의 10주기를 앞두고 주간함양은 지난 8월23일 오후 성남시 분당구에 부인 오응옥(93) 여사 자택을 방문했다. 오응옥 여사를 만나 故박경호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故박경호 선생은 마천 음정마을에서 태어났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읜 그는 2년 뒤 설상가상으로 음정마을의 대화재가 발생해 가옥과 전 재산이 소실되어 생활 터전을 잃게 됐다. 이에 살길을 찾아 전 가족이 고향을 떠나 평양에서, 다시 황해도 사리원에서의 고달픈 타향살이를 이어갔다.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1948년 월남해 서울에 정착하게 된 故박 선생은 오응옥 여사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서로 사랑해서 만났지만 결혼하기까지 많은 반대에 부딪쳐왔다는 두사람. 집안의 반대로 나무에 목을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도 했다는 오 여사다. “당시 저희 집안은 부유한 편에 속하는 한편 남편은 형편이 좋지 못해 어머니께서 결혼을 굉장히 반대하셨어요. 당시에는 너무도 힘들어서 산으로 도망가 나무에 목을 매기도 했는데 나무가 부러져서 살았죠. 마침 남편이 저를 찾아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납니다. 그렇게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식에 친정식구들은 한명도 오질 않았죠” 신혼의 단꿈도 잠시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어려운 생활은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故박 선생은 가난과 실의와 절망 속에서도 남달리 생활력이 강한 오 여사의 내조에 힘입어 반전의 계기를 맞는다. 함께 일하는데 손발이 척척 잘 맞았다는 두사람은 삼(蔘)장사부터 집장사, 정육점 등 하는 장사마다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한때는 의류상으로 남대문시장과 지방을 누비고 다녔고, 구로동 비닐공장을 경영하기도 하고, 김포에서 벼농사 일도 하는 등 다양한 일들을 해온 故박 선생과 오 여사다. “막 결혼을 하고 초기에는 고달픈 생활이 창피하기도 했었어요. 그래도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서로를 의지했죠. 그러다 남편과 여러 장사를 시작했는데 워낙 손발이 잘 맞아서 밤낮으로 열심히 함께 일했고 하는 것마다 성과를 내면서 안정적인 생활로 접어들었습니다. 둘 다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어려운 시기를 굳건히 이겨내고 일어서게 된 두 사람. 자수성가를 통해 형편이 많이 여유로워지자 故박 선생의 눈은 고향 마천으로 향했다. 원방장학회 설립 이전부터 마천의 학교에 책걸상을 지원하고 마을에 회관을 지어주는 등 고향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애정을 보여준 그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고향 마천만을 생각했다며 오 여사는 고인의 마천 사랑을 강조했다. “워낙 힘들게 살아왔고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것에 대한 한도 많다 보니 베풀고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정말 컸었어요. 남편의 뜻대로 마천에 많은 봉사를 함께 이어갔죠. 장학금을 출연할 때는 친정에서 미쳤냐고 할 정도로 파장이 있었지만 남편은 고향에 대한 봉사를 멈추지 않았어요. 지역 교육발전에 여전히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故박 선생이 떠난 지 9년이 되는 지금에도 많은 함양인들은 그의 고향 발전을 위한 따뜻한 행보를 기억하고 있고 존경을 표하고 있다. 10주기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오 여사는 여전히 남편이 그립고 보고싶다며 눈물을 보였다. “지금도 매일매일 방에 걸려있는 남편 사진을 보고 그리워하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말 좋은 사람이었죠. 죽어서라도 보고 싶은데 죽어지질 않아요. 죽어지질 않아.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그래도 보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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