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만남’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의도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장소에서 그리고 서로 다른 시간에 이루어지는 특이한 만남도 있다. 이러한 특별한 만남은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1841년생인 이토오히로부미는 만주철도건설이라는 명목적인 목적을 가지고, 그리고 조선합병이라는 목적을 숨긴 채 러시아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향했다. 1879년생인 안중근은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토오히로부미를 만나기 위해 만주 하얼빈으로 향했다. 목적이 다른 두 사람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났다. 1880년생인 문태서는 일본영사관에서 실시된 안중근 심문조사 과정에서 일본 검찰관의 소개로 이름으로만 만났다.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세 사람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또는 다른 시각,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면 이 만남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시각과 장소를 찾아서는 안된다. 세 사람이 공통되게 얽혀있는 사건을 찾아야만 한다.≫ 이토오히로부미가 만주에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이토오히로부미는 일본의 개화기가 시작될 무렵인 1841년 가난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의 근대화를 이루어 낸 일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일본헌법을 만들어 근대 일본국가의 기초를 다졌으며, 헌법에 기초하여 정부를 운영하는 입헌정치를 확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조선을 정치적으로 몰락시켜 일본 영토를 해외로 확장시켜나가기 시작한 정치가이자 외교관이다. 초대 일본총리를 지냈으며 이후 3번의 총리를 더 지내고,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통감이 된다. 하지만 이토오히로부미의 영광은 여기까지이다. 그의 화려하고 막강한 정치력은 두 차례의 해외전쟁을 통해 성장한 군부세력들에 의해 배척당하기 시작했으며, 육군대장 가쓰라가 제11대 총리로 임명되면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토오히로부미의 정계은퇴를 바라는 가쓰라 내각은 이토오히로부미에게 ‘대한제국 합병’이라는 과제를 부여하고 실패해도, 성공해도 물러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가쓰라와 고무라는 이토오히로부미에게 한국 병합을 강요했으며, 이토오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을 병합하는 것이 그 대강에 있어 옳다”는 답변을 내놓음으로써 1909년 7월 6일, 내각에서 대한제국 병합이 결정되었다. 이토오히로부미는 한국 병합을 위해서는 우선 러시아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코콥초프 재무대신을 만나 논의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출국했다.1)≫ 안중근이 이토오히로부미를 만나러 만주에 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 1908년 10월 12일, 연주(煙秋) 가리(可里)2)에서 강기순(姜基順 四十歲 前後 義兵 住所는 京城), 정원식(義兵 三十餘歲 住所는 未詳), 박봉섭(三十四歲 農夫 咸鏡道)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3) 仁燮·重根은 伊藤 公爵을, 泰勳 등 3명은 李完用·朴齊純·宋秉畯 등의 암살을 담당하고 하늘에 제사지내고 동맹해 그 증거로 서로 왼손 무명지를 제1관절부에서 절단했다.4) 이 후 안중근은 이토오히로부미를 죽일 기회를 찾고 있었으며, 그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내었다. 9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원동보(遠東報)』와『대동공보(大東共報)』의 기사를 통해 이토가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Kokovsev, V.N.)와 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해 만주에 오는 것을 알았다. 이와 관련하여 안중근은 상세한 내용을 [旅順監獄에서의 安重根 제7차 진술내용]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중략) “나는 이번에는 색시를 얻을 작정으로 왔으니 상당한 부인이 있거든 소개해 달라”고 일부러 냉담을 꾸미기 위해 능청을 떨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실제로 이토오히로부미가 온다는 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대동공보(大東共報)』,『원동보(遠東報)』,『동경매일신문(東京每日新聞)』등을 주인에게 부탁해서 가져오게 해 보았더니, 과연 그랬다. 이토오히로부미는 하얼빈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오기 위해 일본을 떠나 대련으로 향했다는 전보, 잡보, 외보의 어느 난이었는지 지금은 기억할 수 없지만 기사가 나 있는 것을 보았다.5) 그리고 안중근은 범행 전 대동신문사 이강(大東新聞社 李剛)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삼가 아룁니다. 말씀드리자면 10월 22일 오후 8시에 이곳에 안착해 노야 김성백 씨의 자택에 체류하고 있습니다.『원동보』에서 조금씩 보았습니다만 이토오히로부미로 말하자면 이달 10월 25일) 관성자(현 중국 장춘)를 출발해 러시아철도총국 특송 특별열차에 탑승해 동일 오후 11시에 하얼빈에 도착할 모양이므로 동생 등은 친구 조도선 씨와 더불어 동생의 집안 식구 마중을 위해 관성자로 간다고 말하고 함께 관성자에서 몇 십 리 떨어진 바로 앞 모 정거장에서 이를 기다렸다가 그곳에서 드디어 일을 결행할 작정이므로 그렇게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일의 성공 여부는 하늘에 있으니 다행히 동포의 선도를 기다리며 신조를 받기를 바랍니다. 또 이곳의 김성백 씨로부터 금 50원을 차용했으므로 지급히 갚아주시기를 여러모로 갈망합니다.6) "대한독립 만만세” 안중근은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오히로부미를 죽여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당당하게 이토오히로부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으며, 거사에 성공한 이후에도 도망하지 않고 만세를 부르며 체포되었다. 이토오히로부미를 죽여야만 하는 이유를 체포 이후 실시된 제1회 피고인 신문조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 지금으로부터 십여년전 이토오히로부미의 지휘로 한국 왕비를 살해하였다.2. 지금으로부터 오년전 이토오히로부미는 병력으로써 오개조의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그것은 모두 한국에 대하여 비상히 불이익한 조항이다.3. 지금으로부터 삼년전 이토오히로부미가 체결한 십이개조의 조약은 모두 한국에 대하여 군사상 대단히 불이익한 사건이다.4. 이토오히로부미는 기어이 한국 황제의 폐위를 도모하였다.5. 한국병대는 이토오히로부미로 인하여 해산되었다.6. 조약 체결에 대하여 한국민이 분노하여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 관계로 이토오히로부미는 한국의 양민을 다수 살해하였다.7. 한국의 정치 기타의 권리를 약탈하였다.8. 한국의 학교에서 사용한 좋은 교과서를 이토오히로부미의 지휘 하에 소각하였다.9. 한국 인민에게 신문의 구독을 금하였다.10. 하등 충당시킬 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질이 좋지 못한 한국 관리에게 돈을 주어 한국민에게 아무 것도 알리지 않고 드디어 제일은행권을 발행하고 있다.11. 한국민의 부담으로 돌아갈 국채 이천삼백만원을 모집하여 이를 한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그 돈은 관리들 사이에서 마음대로 분배하였다고도 하고 또는 토지를 약탈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고도 하는데 이것이 한국에 대하여는 대단히 불이익한 사건이다.12. 이토오히로부미는 동양의 평화를 교란하였다. 그 까닭은 즉 노일전쟁 당시부터 동양평화 유지라고 하면서 한황제를 폐위하고 당초의 선언과는 모조리 반대의 결과를 보기에 이르러 한국민 이천만은 다 분개하고 있다.13. 한국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토오히로부미는 한국보호의 이름을 빌어 한국 정부의 일부인사와 의사를 통하여 한국에 불리한 시정을 하고 있다.14. 지난 사십이년 전 현 일본황제의 부군인 분을 이토오히로부미가 없애 버린 그 사실은 한국민이 다 알고 있다.15. 이토오히로부미는 한국민이 분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황제나 기타 세계 각국에 대하여 한국은 무사하다고 하여 속이고 있다.7)안중근은 이상의 죄목으로 이토오히로부미를 살해하기 위하여 하얼빈역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1) https://namu.wiki/w/이토오히로부미 생애/14.대한민국합병에 찬성 - 저자가 내용 재해석 및 편집2) 산골짜기를 따라 동서로는 6~7리, 남북으로는 27리 정도의 넓은 평지에 집들이 흩어져 있는 농촌 마을이다. 중국의 훈춘[琿春]에서는 남쪽으로 30리 가량 떨어져 있고, 지금은 크라스키노(Краскино, Kraskino)라고 불리는 러시아의 군영인 노보키예프스키(Новокиевский, Novokiyevskiy)에서 북쪽으로 10리 거리에 자리 하였다. 강변의 기름진 땅을 경작지로 삼았고, 주변의 군영에서 큰 규모의 토목공사를 하여 경제적으로는 늘 넉넉한 편이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연추 [煙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3) 한국독립운동사자료 6 안중근편Ⅰ 三七. 被告人 安應七 第八回 訊問調書4) 統監府文書 7권 一. 安重根關聯一件書類 (309) 伊藤 公爵 흉변에 대한 보고5)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統監府文書 7권 (293) [旅順監獄에서의 安重根 제7차 진술내용]6)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統監府文書 7권 (218) [禹德淳·安應七이 범행 전 大東新聞社 李剛에게 보낸 書翰文 송부 件]7)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안중근편Ⅰ 二. 被告人 訊問調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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