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은 군대해산 이후 덕유산을 근거지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여 대활약을 펼치다 순국한 의병대장 문태서 장군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기 위해 매년 4월 문태서 의병장 추모사당에서 추모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주간함양은 전진석 3·1운동 함양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덕유산 호랑이’ 문태서 장군 부활을 꿈꾸며>를 30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문태서 의병대장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고귀한 희생정신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장면 1_ 일본검사가 안중근에게 물었다. ‘한국 통감직을 마치고 돌아와 일본 저택에 머물던 이토 히로부미. 그는 조선 병합이 가까워진 1909년 10월 68세의 고령으로 만주 시찰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정작 이토는 그것이 정치적 목적이 아닌 개인적 여행이라고 강조했다. 과연 그랬을까. 당시 서양의 여론들은 이토의 만주 방문 목적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조선 병합을 앞두고 러시아의 의중을 떠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토는 마지막 만주시찰 길에도 동양 평화를 운운했다. 겉과 속이 다른 이토의 동양 평화는 당시 언론의 풍자 속에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결국 이토의 만주 방문은 러시아로부터 한국과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받기 위한 노정객의 마지막 행적이었다.’1)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만주 하얼빈 역에서 3발의 총소리가 연이어 울린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지고, 다시 한 발의 총소리가 3번 더 이어진다. 처음 울린 세 발의 연속된 총소리는 한국침략을 이끌던 이토 히로부미를 향했으며, 이어진 총소리는 수행원 3명을 향했다. 안중근은 당당하게 큰 소리로 세 번 외쳤다.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1909년 12월 2일, 여순감옥에서 일제 검찰관은 안중근을 대상으로 제5차 심문을 이어갔다. (287) [安應七 제5차 진술내용](국역)1909년 12월 2일 여순감옥에서 일본 경찰조사관(현 치안감급)이 안중근을 상대로 제5회 심문을 진행하였다. 1. 하얼빈에서도 홍범도의 이야기는 한 적이 없다...2. 『해조신문』 시대에는 최봉준(崔鳳俊)이 사주였으나...3. 홍범도는 갑산을 근거로 하는 자이고......15. 이완용(李完用)은 나라를 말아먹은 놈들의 우두머리다......최익현(崔益鉉)은 고명한 인사이다... 박제순(朴齊純)은 우리나라의 대신으로 매국 문서에 도장을 찍은 사내이므로... 이근택(李根澤)은 박제순과 같은 놈이다. 문태수(文泰洙)는 모른다.2)일본 경찰 조사관은 1~14번까지 질문을 통해 하얼빈에서 일어난 사건과 직접 관련된 인물에 대해 물었다. 이어진 15번에서는 국내 주요 인물에 대한 안중근이 가진 정보와 생각을 물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동 시대를 움직인 을사오적과 친일파 인사, 유명 우국지사들이 순서대로 언급되었는데 최익현, 박제순, 이인영, 이근택에 이어 15번째로 문태수를 물었다. 이후에 베델, 박영효, 안창호, 홍범도 등 40여명이 언급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문태서로 알려진 의병대장 문태수가 일제강점기 직전 벌인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전쟁에서 가지는 위상이다. 왜 일본 조사관은 안중근과 문태수 관계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을까?≫장면 2_ 일본검사가 서울진격 13도 창의대장 이인영에게 물었다.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 구국 운동은 그 규모와 성격 면에서 의병전쟁으로 발전되어 갔다. 군대해산 당일 시위대 제1대대장 박승환의 자결을 시발점으로 하여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던 해산 군인들이 그 후 의병에 합류함으로써 조직과 화력이 강화되었다. 전국의 의병부대가 서울진공을 위한 연합전선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인영이 중심이 되어 먼저 전국 의병장에게 격문을 보내 [각 도의 의병이 단결하여 서울을 탈환하자]하고, 또 그는 서울에 있는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서한을 보내 의병을 국제법상의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것은 스스로 독립군임을 내세운 것이었으며, 이 계획은 실로 의병 운동이 정치적으로 크게 발전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병 서울 진공 작전은 실패하였으며 이인영은 1909년 6월 7일 경북 황간에서 일군에 체포되었다. 여기서도 문태수는 중요했다. 1909년 6월 20일, 경성헌병대에서 헌병대 대위가 이인영을 대상으로 제2차 심문을 했다.문 : 李九載, 柳麟鍚, 申明均, 張志相, 趙需衍, 李範允, 李海春, 李範晋, 朴永川문 : 전해산(全海山)은 알고 있는가?답 : 모릅니다. 문 : 문태수(文泰洙)는 어떤가? 답 : 이름은 들었습니다만 만난 적은 없습니다. 문 : 유생인가?답 : 학문은 있지만 유생은 아닙니다. 문 : 학문이 있고 유생이 아닌 것은 어떤 점에 구별이 있는가? 답 : 진짜 유생은 孔孟의 가르침을 받고 이를 지키려는 자를 말합니다. 문 : 심남일(沈南一), 심노술(沈魯述), 홍범도, 차도선, 최익현, 장지연, 안창호, 양기탁, 베델(중략)문 : 그때 인솔하고 온 각 도의 지휘자는 누구누구인가? 답 : 전라도는 문태수(文泰洙), 본명은 문태현(文泰鉉)이라 하며, 충청도는 이강년(李康年)(중략) 문 : 집합 이유는 대략 판명되었다. 각 군의 호칭은 무엇인가?답 : 전라도는 전라창의대장(全羅倡義大將), 전라창의유진소(全羅倡義留陣所)라고 하고, 충청도는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중략)문 : 무기는 어떤 수단으로 모았는가?답 : 의거에 즈음해서는 각자 소지한 총기를 가지고 모였습니다. 문 : 총기 종류는 무엇인가?답 : 전 鎭衛隊에 있던 병졸은 서양식 총을 가지고 온 자도 있었습니다만, 나머지는 화승총입니다.(중략)문 : 서양식 총은 네 부하 중 몇 정 정도 가지고 있었는가?답 : 날짜가 오래되어서 자세하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문 : 鎭衛隊의 병사가 서양식 총을 가지고 왔다고 하였는데, 그 병력은 몇 명 정도였는가?(중략)3)≫장면 3_ 문태서와 역사가 함양군민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묻는다. 구한말 대한제국을 침략하는 일본을 막아내기 위해 많은 분들이 노력했다. 그 중 군사적 행동으로 참여한 사람들을 구한말 의병이라고 부른다. 의병들이 벌인 치열한 구국전쟁 중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13도 의병 서울진격작전’에서 ‘호남창의대장 문태수’가 화려하게 등장한다. 물론 문태수는 함양에서는 ‘문태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들은 문태수 장군의 등장을 의외라고 여기겠지만, 이는 다분히 현재의 시각이다. 풍부한 역사적 기록이 남아있고, 흔적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관심과 역사의식이 부족하여 그저 단순한 ‘호남의병대장, 덕유산 호랑이’로 불리면서 이름없이 사라져 가고 있을 뿐이다. 문태수 장군의 업적은 남은 기록만으로도 그가 당대 가장 강력한 의병부대장이었음을 중명한다.
하얼빈 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오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에게도 ‘문태수를 아느냐’고 물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하얼빈역 이토오히로부미 사살사건’에서도 문태서 장군이 등장할 정도로 당대에 유명한 의병장군이었다. 하지만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 대부분은 그러한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문태수는 고향인 함양에서조차 신출귀몰한 덕유산 호랑이였다는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방식으로 알려져 왔을 뿐, 사료를 충분히 검토하지 못해 그 업적을 널리 알리지 못하고 있다. 역사가 이긴 자들의 입장에서 쓰여 진다는 사실, 더구나 임시정부 수립 100년, 해방 70년이 흘렀어도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았다는 현재 상황들을 고려한다고 해도 후손으로서 부끄러울 뿐이다. 이에 간략하게나마 한국과 일본이 가지고 있는 각종 문서와 사료를 토대로 문태서 장군의 업적을 짚어보면서, 함양인들이 앞으로 할 일을 제시하고자 한다.
문태서 장군4)과 역사는 함양군민들에게 묻는다. “문태서를 아느냐?”
1) [출처] 안중근은 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는가?작성자 대모달https://blog.naver.com/network2007/223277410358 2) 統監府文書 7권 一. 安重根關聯一件書類(哈爾賓事件書類 一∼六, 伊藤 公遭難事件書類 一~四, 安重根及合邦關係事類 一~三, 하얼빈事件憲兵隊報告 一~三)3)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統監府文書 8권 一. 李麟榮陳述調書 (2)[暴徒巨魁 李麟榮 調書 보고 건]4) 문태수의 이름은 한글로는 9개, 한자로 18개이다. 공식적인 문건에서는 문태수(文泰洙)로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비공식적인 자료에서는 문태서(文泰瑞)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덕유산을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면서 주민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인 ‘문태서’로 사용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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