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을 뜨겁게 달구던 22대 총선이 끝날 무렵 우리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당선된 국회의원 20%가 범죄 피의자 신분이며 사회적으로 비도덕적 흠결이 있는 사람이었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통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회는 욕설과 막말과 범법이 능력이요, 대학생 딸에게 11억 대출받게 해 강남 아파트 사는 게 능력이다. 잘못 인정한다면서도 자기반성이 아니라 상대방을 향해서 “너나 깨끗해라” 조롱하는 게 능력이다. 표창장 위조해 딸 의전원 보내는 게 능력이다. 범죄 혐의에도 정치에 나서 제3당 만드는 게 능력이다. 자식 위한 일에 그깟 사소한 범법이 무슨 잘못이냐 여기는 게 능력이라고 외치는 자의 팔을 들어 올려 준 반면, 위조문서 만들 여건이 되지 못한 이들, 할 수 있어도 차마 하지 못한 이들이야말로 무능한 것이라고 편을 들어주지 않는 냉혹함이 있다.
이제는 한술 더 떠서 죄를 지은 피의자 신분인 국회의원이 자신을 수사한 검찰을 공격한다. 도둑이 자신을 잡은 경찰을 향해 큰 소리로 야단을 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불의한 사회는 악인을 선하다고 하며, 선인을 악하다라고 말하며 공격하는 사회이다.
반면 정직하고, 친절하고 마음이 고운 착한 사람은 함부로 대하고 가볍고 쉽게 생각하여 업신여기는 풍토가 이 사회에 만연하고 있음을 본다. 어떤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 얘기를 하다가 “나는 착한 게 싫다. 왜냐하면 일 못하는 직원이 주로 착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착함과 능력은 범주가 다른데도 ‘착함은 곧 무능’이라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소하고 궂은일은 떠넘기고 주목받는 일 좇으며 성과 내는 이기심을 능력이라고 자랑한다. 아랫사람 윽박지르고 핍박해서 퍼포먼스 보이는 게 능력으로 비추도록 사회가 만들었다. 남들이 기피하는 일, 돋보이지 않는 일 묵묵히 하는 이들이 무능한 사람이라고 보는 사회는 미래와 희망이 없다.
이처럼 건전한 시민의 덕성인 착함이 무능과 동일시되는 시대와 죄를 범하였음에도 부끄럽지 않고 뻣뻣하게 얼굴을 들고 큰 소리를 내는 시대, 입으로는 정의를 외치면서 시민의 도덕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사회에서 살고 있음에 비애를 느낀다.
임진왜란 발발 전인 450년 전 남명 조식 선생은 당시 사회를 관망하며 “요즘 배웠다는 사람들은 손으로는 물 뿌리고 비질하는 법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하늘의 이치를 말하며 이름을 도둑질하고 남을 속인다” 라고 일갈했다. 왜 비질하기 전 물을 뿌리는가. 먼지를 최소화해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는 ‘착한 마음’ 에서이다. 성경에서도 “너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고 교훈한다. 관용이란 친절하고 남을 배려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이러한 정신을 본 받아 추수할 때 가난한 사람들이 이삭을 주워가질 수 있도록 땅에 떨어진 이삭은 남겨둔다. 이렇게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도와주고 보호하는 착함은 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고 살맛나게 하는 것이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 희생과 존중 같은 가치가 조롱받는 사회는 건강하지도 않고 어느 수준 이상으로 발전할 수도 없고 계속해서 불행한 사고와 사건으로 몸살을 앓게 될 것이다.
드라마 ‘돌풍’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주인공은 “내가 바라는 세상은 죄인이 부끄러워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고 했다. 작가는 악인이 득세한 이 사회를 고발하기 위해 이 대사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불편한 진실이다.
그렇다면 착함이 자랑스럽고, 죄인이 부끄러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하지 않으며 무례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내지 않고 착함을 칭찬하는 것. 사랑은 악한 생각을 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기에 죄를 용납하지 않음으로 죄인이 부끄럽게 느낄 수 있는 정의롭고 공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