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엄마가 많이 편찮으셨다. 췌장암으로 2년을 사신다고 진단을 받고 2년을 넘긴 때였다. 나는 시골교회 사모로 주중에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주말에는 심방을 하며 교회를 돌아봐야 했기에 어머니를 자주 뵈러갈 수가 없었다. 토요일에 짬을 내서 가끔 뵈러갈 수 있었다. 가늘게 이어지던 엄마의 생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가슴으로 슬퍼해야 마땅했지만 머릿속부터 복잡해져왔다. 엄마에게만 짧게 복음을 전하고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터였다. 친정 식구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예수님의 희생에 대하여 아직 제대로 말할 기회도 없었고 삶으로 보여주지도 못했다. 친정 식구들과의 친밀함도 이제 서서히 흐려질 것이고 그러면 점점 서먹해질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엄마를 멀리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이렇게 가시면 하늘도 나의 맘을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엄마, 사람은 죄인이에요. 예수 믿고 천국가요”할 때는 “늦었다”하셨으면서도 사위가 전하는 복음은 마지막 지푸라기 잡듯 붙잡으셨다. “장모님,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양편에 강도 둘이 같이 십자가에 달렸는데, 그 중 한 편 강도가 ‘주님 나라에 임하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하고 예수님을 붙들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장모님도 지금 예수님을 붙드시면 됩니다. 저를 따라 해보세요.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천국으로 인도해 주세요” 놀랍게도 엄마는 사위의 기도를 또박또박 따라하셨다. 그러던 한 날 아침에 일어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겨우 출근해 일을 하는데 도무지 생기가 나지 않고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날로 사표를 쓰고 엄마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키러 갔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눈을 감은 채 뜨지도 못하시고 의식도 없으셨다. 나는 기도도 찬송도 잘 나오지 않았다. 병상에서 생명을 연장하며 긴 시간을 보내실 것 같아 마음으로 먼 길을 준비했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 함께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 소롯이 돌아가셨다. 그렇게 엄마의 임종을 홀로 지켰다. 남긴 고백으로 봐서는 능숙한 믿음에 비할 바 못되었으나 임종과 장례전후로 있었던 기적 같은 인도하심을 생각할 때, 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엄마가 지금 천국에 계심을 믿는다. 벌써 전에 돌아가셨던 아버지를 현충원에 모시면서 엄마도 같이 안치하고 돌아왔다. 장례 다음날 엄마가 마지막 노년을 보내셨던 한산도에 들어갔다. 거기서 큰 오빠는 유품을 정리하고 큰 올케와 같이 밥을 해먹고 돌아왔다. 마당에 주인 잃은 게발선인장이 새 주인을 찾고자 힘껏 꽃봉오리를 뿜어내고 있었다. 평소에 너무 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게발선인장의 주인 노릇, 이제 엄마가 두고 가신 선물이라 생각하고 내가 키울 작정으로 집으로 가져왔다. 오월에 으아리부터 핑크달맞이 향패랭이까지 천국에서 갓 배달 온 듯 풍성하고 더없이 예쁘더니, 화분 살짝 닦아준 것 밖에 없는데 이 게발선인장도 천국을 오가고 있었다. 하루 이틀이면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빛나는 꽃잎을 자랑하고 나설참이었다. 많은 재산을 남겨주지는 않았지만 여느 선지자를 흉내 내듯 “이제 꽃길만 걸어라”하고 덕담을 하시고 가신 엄마! 인생에 온갖 파도가 걷힐 날이 없었지만 안식이 찾아오리란 희망하나 안고 살아왔는데 구름 사이로 한줄기 빛이 비추기 시작하던 시점을, 늘 자식만 생각하는 그 눈이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게발선인장은 엄마가 보낸 천국의 선물처럼 한꺼번에 피어났다. “그래요 고마와요. 엄마도 우리가 소개시켜준 예수님과 오래오래 천국에서 행복하게 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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