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란 의미를 한 번쯤은 새겨 볼 필요가 있다. 과거에 묻혀서 미래를 보지 못함도 문제이다, 그러나 과거에 처절할 만큼 힘겨운 전투에서 백성군이 7만여 명이나 되는 왜군들을 격퇴 시켰던 황석산성 전투가 있었다. 임진왜란에서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외치면서 2달 만에 평양을 탈환하자 조선은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지만 명나라는 왜군에게 길을 내어준 것처럼 의혹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왜군은 이순신과 의병들이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왜군은 더 이상 진군을 할 수가 없었고 명나라 공격은커녕 조선도 통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쪽 지방으로 철수를 하여 바닷가에 왜성을 쌓고 명나라와 강화 회담을 했다. 그 회담에서 일본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풍신수길은 조선을 재침략할 것을 결정하여 남한 4도를 분할할 것을 천명하고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을 우리는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정유재란은 좌군과 우군의 부대로 나누어진 황석산성 전투와 남원성 전투로 대표되는데 이 전투에서 코 베기가 행해지고, 청야작전으로 인해 군량미를 구하지 못해 사람을 잡아먹는 등 언급할 수 없는 행위를 하면서 국토를 유린했다. 그 중 대표되는 황석산성 전투에서 백성군은 전원 옥쇄했지만 왜군 역시 백성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했으며 더 이상 전투할 의지를 상실했다. 당시의 전투 상황을 요약해 보면 백성군 7천여 명1), 왜군 7만여 명2)이 5일간 황석산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있었다. 그 결과로 왜군은 48,3003)여 명이 사상했고 마지막 날 백성군 7천여 명이 전원 옥쇄했다. 부녀자들은 적의 손에 더럽혀지느니 차라리 바위에 몸을 던져 죽음을 택했다. 그래서 그 바위는 피로서 붉게 물들었고 지금은 피바위라 부른다. 왜군은 7만여 명 중 27,000명만 겨우 살아서 전주성으로 이동하였다. 전주까지는 겨우 100km 정도인데 일주일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는 상처 입은 동료들을 메고, 안고, 치료하면서 이동을 하고 그리고 상처 때문에 죽는 자는 매장하면서 이동함으로써 많은 시일이 걸렸다. 그런데 이 전쟁이 지금까지는 묻혀 졌지만 세세년년 인구에 회자 되어야 할 만큼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승리한 전투였다.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한 조선의 지배층에 대한 백성의 승리였고 조선 중기에 사회적 계층의 모순을 드러내는 상징적 존재로 치부되는 전투였는데 그 모순된 사회성을 질타하고 우리 백성들의 자주적인 전쟁에 대한 승리이자 백성이 중심되는 사회를 지향하고자 하는 방향도 제시된 전쟁이었다. 이는 육지의 명량대첩이요 7년 전쟁을 종료시킨 결정적인 전투이다. 그런데 이 전투가 잊혀진 것은 1910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사서 20만 권을 불태웠고4) 징비록, 선조실록, 함양, 거창의 郡史와 조종도의 대사헌 사적집, 곽준의 존재실기, 박명부의 지족당 문집 등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수정하고, 가필하여 후손들에게는 자신들의 치욕스런 패전의 기록을 감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왜군들은 전쟁에서 1명의 사상도 없고 조선의 백성들만 사상자가 생긴 전투로 기록했기 때문에 잊혀진 전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잊혀진 역사를 다시금 재조명하여 인근의 만인의 총이나 칠백의 총처럼 추모공원을 조성하여 국가에서 관리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후손들에게는 피와 눈물로 지켜낸 승리의 역사를 바로 찾아서 올바른 평가가 되도록 해야 한다. 조정의 아무런 지원도 없이 순수한 백성들의 힘으로 끝까지 싸워서 전원 옥쇄했지만 왜군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한 승리한 전투이다. 인근의 남원 전투와 금산 전투는 모두 백성군이 패배한 전투이지만, 황석산 전투는 승리한 전투여서 더욱 더 호국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늦은 감이 있지만 황석산성 성역화 사업추진위가 구성되어서 위의 자료를 토대로 유관기관과 협조를 하여 산성을 지키려고 산화한 선인들의 의지를 담아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게 추모공원을 조성해야 한다. 그리고 당시에 전투에 참여한 7개 현5)에 포함된 군민들의 협조를 구해서 유명을 달리한 영혼들이 편히 잠들게 하고 순국선열들의 혼들을 기리고 역사적 교훈을 계승하도록 해야 한다.   1) 劉名蓋年譜에 의하면 거창, 함양, 안의의 3개 縣에서 1000명 이상(3000명), 각 縣의 경비병 70명 × 7개 현 = 약 490명, 유명개의 가솔들 700여 명, 초개,삼가,합천,산음(산청)의 피난민, 그리고 당시에는 노비와 종들은 인원에 포함되지 않았고 부녀자들 역시 백성군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청야작전으로 인근지역에서는 식량이 없었고 그리고 왜군의 약탈로 산성으로 입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보면 산성에 입성한 인원은 7000명을 초과할 수도 있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劉名蓋는 거창좌수 였으며 황석산성 전투의 軍務長으로 함양군수 조종도, 안의현감 곽준과 더불어 3명이 전투의 주된 역할을 함. 만석군의 자손으로 사재롤 털어 군량미 등을 조달함. 황석산 축성 과정에서도 직접 참여했기 때문에 劉名蓋年譜는 다른 매체보다 객관적 자료가 될 수 있고 산성 입성 인원도 현실성 있게 기록되어 있다. 동경대학교 사료편찬실에 소장된 풍신수길의 감사장에도 조선군 353명과 수천 명을 죽였다고 기록됨2) 조중화, 『다시쓰는 임진왜란사』 1996. 298p 학민사 鍋島家 文書(황석산성 전투에서 서문을 담당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 家의 문서에 “모리 데루모도, 조오소 가베모도지가, 가도오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 왜군의 지휘관들이 『황석산성을 일주해 보니 성문은 굳게 닫혀있고 성벽은 높고 견고하여 넘을 수도 없고 뚫을 수도 없었다. 7만의 일본군들은 황석산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저자인 조중화는 일본에서 36년을 살면서 자료들 수집하여 마산에서 약국을 경영하며 일본에서 수집한 자료로 저술한 분이다. 3) 舊日本軍參謀本部 日本戰史에 일본군 편성이 75,300으로 되어있고 전주에서 재편성시 27,000으로 되어 있어서 나머지는 사상자로 보면 48,300이다.4) 환단고기(桓檀古記). 계연수 역주 안경전. 2014. 527p. 상생출판 : 1910년 11월부터 14개월 동안 조선의 역사, 인문, 지리, 족보, 전기, 풍습 등을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독립정신을 일깨우는 외국의 책까지 포함 20만여 권을 불태우고 각종 운동 모임도 금지시켰다. 5) 함양군, 안의현, 거창군, 합천군, 초개현, 삼가현, 산음현(산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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