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깨질세라 꿈이 깨질세라 상대방의 마음이 내 거친 언행에 깨질까... 교양이 있다는 것은 호주머니 속에 생달걀을 넣고 다니는 사람처럼 매사에 조심스럽고 배려심 많은 것을 의미하지 싶다. 어릴 때는 신나게 놀다 보면 누구 하나가 울어야 집으로 흩어지곤 했다. 좀 더 커서는 속이 시원하게 수다를 떨고 나면 어딘가 찜찜해서 며칠씩 후회하곤 했다. 내가 그 패턴을 깨고 잘못을 사과하기 위해 전화기를 든 것은 정말 오랜 세월이 흘러서였던 것 같다. 언제나 늦게까지 당당한 사람은 강해보일지는 몰라도 원성을 사기 쉽다. 나는 언제부터 타인의 구겨진 마음을 큰 문제로 인지하고 대책을 간구하기 시작했을까? 그건 내가 그 반대 입장에 서게 되어 많이 깨져본 뒤에 얻은 경험들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뒷수습하기 시작하는 것, 그보다 먼저 문제가 생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교양 있게 행동하는 것, 그 위에 사랑이 있다. 사랑은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안 하는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것까지를 의미한다. 상상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자람이 있는 채로 사회생활을 한다. 그것은 나의 작은 마음 씀이 의외로 다른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껏 웃어주기, 사소한 것 안 따지고 넘어가기, 가방 들어주기, 노점에서 야채를 사고 얼마 되지 않지만 잔돈 안 받기, 도우미에게 약간의 수고비 더 얹어주기, 동료에게 핀잔주지 않고 친절히 가르쳐주기... 이런 것들은 절제된 행동을 넘어 사랑을 실천하는 작은 몸짓일 수 있다. 더 성숙하면 사랑은 또 다른 얼굴, 자기희생이라는 얼굴로 자신의 것을 이웃을 위해 내어줄 수도 있다. 다시 되돌아올 것이란 기약도 없이... 그렇게 사랑은 악순환하던 사회를 선순환하게 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더 깊이 들어가면 사랑은 무한한 신의 영역으로까지 들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단체든 지도자가 되고자하는 사람에게 필수로 ‘여러 가지 장애 체험을 거치게 하면 어떨까?’하고 생각해 본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함께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사랑의 실천의 필요성을 더욱 현실감 있게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사회는 자본주의 자유 이면의 부작용인 물질만능주의, 빈부격차심화, 성공주의 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까지 하고 있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손익계산서를 먼저 두들겨보는 편이다. 이런 세상에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할 줄 아는 것은 절실히 필요한 지도자의 자질이다. 사랑의 실천이 사회 속에 존재하는 모든 부조리와 불편을 다 제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누릴 수 있다면 타인도 그러고 싶을 것이라는 의식은 아무리 부각되어도 부족함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23번의 직장생활을 했다. 되도록이면 이직하지 않고 오래도록 성실히 일하고 싶었다. 그러나 잦은 잔병치레와 탈진으로 그러지 못했다. 꾀나 빡빡했던 인간관계도 한몫을 했다. 노동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경력단절의 이유로 막노동도 마다않고 기쁘게 하곤 했는데 텃세라는 것들에 번번이 두 손을 들어야했다. 사람이 무르면 무른대로, 강하면 강한대로, 늘 영혼까지 집어삼켜야 직성이 풀리는 텃세문화는 받아들이려야 끝내 받아들일 수 없는 악순환의 원인이었다. 버스를 타자마자 내릴 곳에서 대기했던, 여유로움을 미리 만들어놔야 속이 풀리는 나였는데 직장 내 대인관계 문제는 언제나 나를 조여 오는 큰 숙제였다. 나이가 들면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지병이 생기기 마련이다. 사회공동체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사회공동체의 건강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의 약함도 감싸 안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굳이 왜 그래야 되느냐?’고 되묻는다. 우리 사회엔 아직도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혼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들이 부족해 보인다.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심한 경쟁 속에 아등바등 살아야하는 사회는 일상생활초차 피곤에 쌓이게 만든다. 생달걀을 품은 것처럼 살면서 배려하고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사회 일원을 잠시나마 숨 돌리게 하고 행복한 꿈을 꾸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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