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작은 딸과 함께 대화 중 ‘살아가면서 내가 타인에게 받은 감동적인 친절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소위 미담이라고 일컫는 내용들 이었다.    그런가하면 아주 악의적이고 무례한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은 일도 많다.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선한 사함과 악한 사람과의 간격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 그 옛날 맹자는 모든 사람은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은 주장하고 반대로 순자는 모든 사람은 악하게 태어난다는 ‘성악설’을 주장한 것 같다. 그리고 사회는 그와 같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면서 좋은 일도 많고 좋지 않은 일도 발생하는 것이다. 아내가 말하기를 선교사가 세운 출신 고등학교의 교훈이 ‘남을 위하여 살자’이었는데 당시에는 그 참된 뜻을 헤아리지 못하여 불만스러웠다고 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갈수록 ‘남을 위하여 살자’ 라는 교훈이 매우 뜻깊은 의미임을 알았다고 한다. 두 번 다시 되풀이 되지 않는 한번 사는 인생을 나 혼자 잘 살아 보겠다고 남에게 손해와 해악을 끼치는 삶은 오히려 허무하고 불행을 자초하는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촛불은 비록 나 자신은 점점 작아질 지라도 어둠속에서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유익한 모습이 아닌가? 연필 역시 비록 나 자신은 점점 닳아져 갈지라도 의미 있게 쓰임 받는 유용한 필기구가 아니가? 한마디로 유익한 모습이라 할 수가 있다. 신앙생활은 유익을 끼치는 삶이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점이 그렇다. 신앙생활을 잘 한사람들은 모두 유익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유익한 삶을 산 사람은 모두 행복했고 무익한 삶을 산 사람은 모두 불행했다. ‘남을 위하여 살자’가 어느 고등학교의 교훈을 넘어 우리 인생의 의미로 삼으면 어떨까싶다. 이 사회가 더욱 밝아지고 아름답고 행복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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