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참 많이 용서받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한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거나 용서받지 아니한 사람은 없다. 우리는 잘못했을 때 쉽게 용서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은 쉽게 하지 않는다. 한 번만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쉬워질 문제이지 않는가? 우리는 이 일로 감정의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한다. 결코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없다. 때로는 참고, 용서했는데 상대에게서 돌아오는 반응과 태도가 내가 생각한 것과 반대라면 매우 큰 분노와 모욕감, 그리고 그를 용서한 자신에 대하여 주체할 수 없는 상실감을 갖게 된다.   그럼 용서는 왜 하는 걸까?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애초에 용서란 단어가 있는 것이 옳은 걸까? 잘못을 했으면 마땅히 그 잘못에 대한 값(벌)을 치르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닌가? 그와 같은 값을 치르지 않기 위해 용서를 구한다면 이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용서는 이러한 기본 사회 질서를 깨뜨리는 부정의 도구가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그렇다, 그렇기에 용서는 하면 안 된다”라고 답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성경은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죄에 대한 용서이다. 얼마 전 지나간 성탄절이 하나님의 용서의 증거이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가 나셨고 그 예수가 죄의 값이 되어 십자가에 죽음으로 인류의 모든 죄는 용서받게 된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인간을 용서 하려는 것인가? 성경은 그 질문에 대하여 그 이유는 용서 받는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말한다. 쉽게 예기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인간을 용서하시기로 하셨고 그 대가로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호기심에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치다 걸린 아이의 부모가 자기가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그 아이의 잘못을 대신 갚아 주고 아이를 집으로 데려오는 것과도 같다. 분명 아이의 잘못이지만 편의점 주인에게 잡혀서 혼나는 아이를 보는 것 보다, 그 아이가 경찰서에 끌려가는 것을 보는 것보다, 대신 값을 치르고 자신이 용서를 구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아이를 용서한 부모는 자신의 마음이 더 이상 상처받는 것을 막기 위함이 아닌가? 아이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부모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용서는 이런 것이다. 용서받는 사람이 아닌 용서하는 이의 마음과 감정이 더 중요하다. 내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에게 상처를 준 타인보다 내가 더 괴로워진다. 때론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은 내가 상처받은 줄도 모른다. 이 무슨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나는 그 일로 괴로워하는데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니 그러므로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빨리 용서하라는 것이다. 결국 자신만 고통 속에서 힘들어질 뿐이다. 그리고 성경은 진정한 복수를 하라고 말한다. ‘되로 받은 것은 말로 준다’ 이는 복수가 아니다. 그럼 복수는 그 말에서 끝나지 않고 말로 받은 자는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두 말, 서 말로 돌려주려 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진정한 복수를 하려면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올려 놓으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원수가 주릴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해서 머리에 핀 숯불을 올려놓은 것처럼 부끄러워 미치게 하게 하라는 뜻이다. 그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짜 부끄럽게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복수가 아닌가? 그것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모두 용서의 진수를 보여준 당신에게 박수를 칠 것이다. 이것이 서로 계속해서 싸우고 결국 진짜 원수가 되고 갈 때까지 가는 어리석은 복수보다 더 아름다운 복수가 될 것이다. 이런 멋진 복수를 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용서로 오히려 더 기쁨이 넘치지 않겠는가? 지난 한 해 동안 혹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있는가? 잊어버리라 새해(것)가 되지 않았는가? 도저히 잊어버려지지가 않거든 그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올려놓는 통쾌한 복수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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