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밀양 영남루(嶺南樓)가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는 쾌거가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밀양시민들이 벌인 “영남루 국보 승격 운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영남루 자체가 지닌 문화재적 가치도 가치이지만, 밀양시민이 합심해 영남루의 가치를 높이려 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비슷한 예로 무주 한풍루(寒風樓)도 있다. 무주 한풍루는 전주 한벽당(寒碧堂), 남원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호남 3한(寒)의 하나로 명성이 높은 누각이었는데, 일제 때 일본인이 이것을 충북 영동의 개인에게 팔아 금강변으로 이건되었다. 광복 후 무주군민들을 중심으로 “한풍루 복원 운동”이 전개, 군민의 성금으로 다시 이것을 사와 1971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복원하였으며, 이듬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었다. 이후 무주군민들의 지속적인 보물 승격 노력으로 지난해 국가지정 보물이 되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결국 지역 주민들이 얼마나 그 건축물을 사랑하고 아끼느냐에 따라 그 건축물의 가치가 또한 높아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그렇다면 우리 함양의 터주대감 학사루는 어떠한가? 학사루는 이미 “고운 최치원 선생이 신라 말 천령태수로 있을 때 올랐던 루”라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처럼 이미 신라시대 때부터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으며, 특히 1380년 왜구의 침략 때 현재의 관변마을에 있던 치소(治所)를 현재의 운림리로 옮기면서 학사루도 같이 옮겼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 ~ 고려 ~ 조선 ~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일한 명칭을 가지고 계속해서 현존한 역사성이 있다. 아마 필자가 보건대, 함양이라는 고장이 생긴 이래 단일 명칭으로 1200년 이상 전래 된 건축물은 이것이 거의 유일하다고 생각된다.특히 학사루는 1498년 무오사화(戊午史禍)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점필재 김종직의 유자광 시판 훼손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인 장소이다. 또한 근현대에 와서는 함양초등학교의 전신으로 군수 박정규(朴晶奎), 신사 노두현(盧斗鉉) 등이 인재 육성을 위해 건립한 사립 함명학교(咸明學校)의 교사(校舍)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함양초등학교의 교사 및 함양도서관으로 이용된 교육도시 함양을 상징하는 매우 뜻깊은 건물이다.학사루의 명칭과 관련해서 연암 박지원이 쓴 “함양군 학사루기”에는, “고운을 사모하는 고을 사람들은 그를 사후의 호칭인 최문창후라 부르지 않고, 반드시 생전의 관직 호칭인 학사로 불렀으며, 송덕비를 세우지 아니하고 오직 누각에도 이름을 붙였다(不曰崔候, 而必號學士, 不曰孤雲, 而必稱其官, 不頌于石而惟樓是名焉)”고 되어 있다. 한 마디로 고운 최치원을 선생을 흠모하는 함양 사람들의 마음이 이 건축물을 천 년이 넘게 지탱해 온 힘이 아닐까? 이에 필자는 문화함양의 기틀은 학사루의 제 가치를 찾는데 있다고 보고 경남도의회에 입성하자마자 5분 발언과 각종 기고를 통해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필자가 경남도의회 문화복지위원장으로서 학사루의 보물 승격을 추진하였는데, 다행히 지난 15일 제8회 경상남도 건축문화재분과위원회에서 보물 승격의 요건을 갖추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제 우리 함양군민이 나서 학사루의 보물 승격을 이루어내야 할 때다. 이미 밀양과 무주의 예가 이러한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함양군민이 모두 힘을 모아 함양의 정체성을 지닌 학사루의 보물 승격을 이뤄가야 하겠다. 문화함양의 기틀은 학사루의 보물 승격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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