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을 앞두고 고향에 놀러 가 할아버지 댁 텃밭을 봤다. 이른 겨울이 찾아와 눈을 맞은 작물 틈 배추들이 크게 잎을 벌리고 있었다. 내가 심은 배추는 고랑도 삐뚤빼뚤하고 벌레 먹은 것도 많아 상태가 제각각인데 할아버지가 기른 배추는 못난 것, 벌레 먹은 것 하나 없이 다 예뻤다. 그 비결을 물으니 물과 비료도 배추 하나하나 크는 모습을 봐서 주고 벌레도 매일 손으로 잡아준다고 하셨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매년 배추를 심다 보면 다 알게 된단다. 다 저마다의 ‘적당히’가 있는 법. 어느 배추 하나 예뻐하지 않을 수 없고 어느 벌레 하나 미워할 수 없단다. 겨우내 먹으라며 고구마 한 박스를 들마루에 꺼내주시기에 남쪽 동네는 고구마 줄기도 김치를 담가 먹는데 그 맛이 별미라 했더니 고구마 줄기는 무슨 맛이냐 되물어보셨다. 제피 맛이 난다고 하니 다시 제피가 무어냐 물어보시는 바람에 같이 크게 웃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채비를 하는 내게 동생들 보기 전에 얼른 숨기라며 주머니에 용돈을 찔러 넣어주시던 할아버지는 평생 배추를 키우듯 우리를 키우셨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배운 게 없어 좋은 말 한마디 못 해줘서 미안타.” 하시던 말씀에 마음이 미어지던 날에는 몰랐다. 어르신들의 지혜는 온통 밭에 있었다는 걸. 계절마다 배추로 피고 꽃으로 피었는데 우리 눈이 어두웠다는 것을. 직접 작물을 기르며 밭을 통해 계절을 바라보는 시야를 가지게 되어서야 비로소 할머니, 할아버지가 배추를 기르시는 마음이 보였다. 재작년 할머니의 첫 제사상을 차리려 할머니 장독대의 된장을 퍼담는데 “큰딸은 살림 밑천이다.”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그 말이 들리는 듯했다. 종갓집 맏손녀로, 큰딸로, 큰누나로 지켜야 할 것들을 말씀하시며 토닥이던 손길과 눈빛들이 떠올랐다. 설날 만두를 빚을 때도, 추석 송편을 빚을 때도 동생들은 장난치며 우주선 송편을 빚었지만, 나는 꼭 예쁘게 빚어야 했던 날들. 제사상을 차릴 줄 아니 시집가서 구박받지 않겠다던 그 말씀들도 당시에는 서럽고 서운했지만, 지금은 그 표현 속 의미를 안다. 사실 더 큰 사랑과 믿음이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멀리 타향에서 배차가 아닌 배추, 무수가 아닌 무, 부추가 아닌 정구지라 부르며 산다. 새우젓이나 멸치액젓만 들어가는 살짝 싱거운 허여멀건 김치가 아닌 젓갈과 해산물도 가득, 양념도 가득 들어간 새빨간 남도 김치를 먹으며 산다. 그럼에도 할머니의 마음들은 매년 마당에서 피는 꽃들과 장독대 속 된장, 뒷마당에 걸어둔 씨오쟁이들이 다시 밭에서 피어나며 상기시켜줄 테다. 귀촌 첫해에 고추와 배추, 무를 직접 길러 김장했다. 고추를 말려 고춧가루를 빻는데 집안 전체가 고추 말리는 냄새로 가득해도 마냥 행복했고, 배추와 무를 절이며 김장하고 가족과 이웃들과 나눠 먹으니 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김치에 들어가는 청각을 몰라서 곰팡이인 줄 알았던 적도, 생선이 통으로 들어가는 모습에 당황했던 적도 있지만, 이제는 그 시원한 맛을 즐길 줄 안다. 요즘 밥상은 이모들이 주신 종류별, 손맛별 김치로 가득하다. 직접 기른 무, 배추, 파로 담근 것임을 알기에 이제 그 마음 하나 허투루 먹는 날이 없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배추를 직접 농사짓고 나서야 깨달았듯이 농촌 또한 그 속에 사는 삶과 정은 직접 살아보고 겪어낸 사람만이 알 수 있으므로. 서른 전에 농촌에 대한 시야를 가질 수 있어 다행이다. 매년 크고 작은 밭을 가꾸다 보면 언젠가 마당에 자라는 고추에게 “잘 잤니, 오늘도 고맙다”라며 인사를 건네던 할머니의 마음이 되는 날이 올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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