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오현, 세계문화유산 남계서원의 주향 일두 정여창 선생의 일두종택에 가면 입구에 일두 홍보관이 있다. 몇 가지 오류가 있어 시정해야 한다.   일두 홍보관-일두의 발자취를 따라서1. 청계산이수봉 2. 혈읍재 3. 함양일두고택 4. 악양정여기에서 가장 큰 오류는 혈읍재 이야기다. 청계산에 일두사적이 있는 것이 기특하여 이수봉 비문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아도 전설이니까 봐줄 수는 있다. 그렇지만 후학인 정구(鄭逑)선생이 이수봉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는 오류다. 없는 사실을 기념하여 명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명명할 리 없다. 관련 기록은 전혀 없고 구전이라고 할 것이다. 구전이라 하면 이수봉 기념비 세울 때 한강 정구선생이 현신하여 축사했다 해도 믿어야 하는가. 더구나 혈읍재 이야기는 엉터리라서 시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오류를 지적한다. “일두가 청계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 무오사화가 일어나”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때 일두는 안음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친구 탁영 김일손도 함양 청계정사에서 요양 중이었다.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의금부도사가 탁영 고향 청도로 잡으러 갔다가 함양으로 다시 와서 잡아갔다. 잡혀갈 때 일두가 전송하니 탁영이 잘 있으라고 인사하자 일두가 나도 뒤따라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스승 김종직이 부관참시당하고 친분이 깊은 김일손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소식을 들은 일두가 이곳을 넘나들면서 너무나 통분해서 울었는데, 그 피울음 소리가 산 멀리까지 들렸다고 하여 <일두유집>을 편찬한 정구(鄭逑)가 혈읍(血泣)재라 불렀다고 한다” 일두와 한강의 기록에는 이런 기록이 없다. 일두는 당시 안음현감이었고 뒤이어 끌려가 탁영과 같이 신문받고 처벌받았다. 탁영은 처형되고 일두는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갔다. 김종직의 부관참시도 동시에 집행된 것이다. 국사에 분명하다. 당당한 무오사화의 순교성인이 혈읍재에서 하릴없이 통분해하며 피눈물이나 흘릴 리 없다. 일두 망신시키는 설화다. 그러니 그 지역의 전설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사실이 없는데 그런 명명을 할 리 없으니 한강 정구의 권위를 끌어들여 신빙성을 높이려는 엉터리 의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두유집>은 1919년에 편찬된 것이고 한강은 75세(1617 광해군9)에 일두증손 춘수당 정수민과 같이 <문헌공실기>를 편찬하였다. <문헌공실기>를 편찬한 정구가 맞지만 혈읍재라 명명한 적은 없을 것이다. 명명한 기록도 없을 것이다. 국사와 문집도 무시하는 엉터리 전설을 신봉하여 일두홍보관에 기술해놓아야 되겠는가. 과천향토사연구회가 청계산 일대에 설명판을 써 붙여 놓았는데 시정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향토사라지만 역사를 왜곡하는 서술을 서슴없이 하면 되겠는가. 일두유적으로 소개시켜 줄 곳도 많은데 하필 엉터리 전설담을 소개해놓을 게 무언가. 다른 소개유적을 추천하면 일두가 30대에 은거 강학한 하동 악양정 앞 강가에 있는 낚시터 취적대와 스승 점필재 김종직의 광풍제월 도학군자 기상을 흠모하여 세운 광풍루, 제월당, 군자정 또는 일두가 절친인 한훤당 김굉필과 강학한 도동서원 근처의 현풍 이노정, 일두와 한훤당을 병향한 이연서원터 근처의 합천 소학당과 지동암, 일두와 한훤당을 병향한 도산서원터 근처인 거창 수포대가 절경이기도 하니 적당하다. 일두홍보관-일두를 배향한 서원일두를 배향한 서원이란 제목부터 틀린 것이다. 용어의 오염이 심하다. 배향(配享)이란 사전적 정의로 “종묘나 문묘 또는 서원에 공적이나 학덕이 있는 신하의 신주를 모심”이다. 여기서 종묘나 문묘는 배향이 맞다. 그러나 서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 서원의 배향은 주향이 아니면 맞는 말이나 주향이면 배향이란 용어를 쓰면 안 된다. 주향은 서원의 주인공이고 배향은 서원의 보좌진이라 보면 된다. 엄격히 정의하면 배향과 종향이 다르다. 문묘나 서원의 제향은 주향이 1등급, 배향이 2등급, 종향(종사와 동의어)이 3등급의 위계질서가 엄격하다. 주향은 독향과 병향 또는 열향, 연향, 합향이 있다. 문묘는 공자가 주향, 사성이 배향, 나머지 십철, 육현, 십팔현이 종향이다. 남계서원은 일두가 주향이고 배향은 없고 개암과 동계가 종향이다. 도남서원은 오현(포은, 한훤당, 일두, 회재, 퇴계)이 병향으로 주향, 소재 노수신은 종향, 서애 유성룡은 배향, 창석 이준과 우복 정경세는 합향했는데 성격은 미상이다. 일두는 모신 서원에서 주향이고 병향, 열향, 연향, 합향으로 주향이다. 문묘에는 종향되었으나 배향된 서원은 하나도 없다. 일두는 어느 서원이든 주향이나 병향이다. 일두를 제향한 또는 향사한 서원이라고 제목을 써야 맞다. 본문에서도 일두를 배향 운운 쓰면 안 된다. 퇴계는 성주의 정자와 주자를 모신 천곡서원에서 한훤당을 배향해선 안 되고 종향해야 한다고 했을 만큼 위계질서에 엄격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정자, 주자, 한훤당이 모두 문묘종사, 전내종향 인물이니 서원을 복원한다면 병향해야 할 것이다. 첫 번째 소개에 영계서원이 있는데 그 설명 “1579년(선조12)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순무사(巡撫使)로 하동(河東)에 왔을 때 그곳이 일두의 관향(貫鄕)이라는 점을 주목하여 여러 유림들과 합심하여 그를 배향하고자 건립하였다” 1920년 완간한 <일두유집> 포증사전 선조 12년(1579,기묘)에 학봉 김성일이 순무사로서 하동에 일두의 관향이라는 이유로 영계서원을 세우고 나중에 배향되었다고 <김학봉집>을 근거로 서술하였다. 그 부록에는 <영계서원 춘추 제향 축문 [김성일]>까지 실었는데 일문이 아니고 이름을 멋대로 무릅쓴 것이다. <학봉집>에는 그런 기록이 전혀 없다. 1579년 당시 김학봉은 장령이었고 순무사를 역임하지 않았다. 오히려 <학봉문집연보>에는 숙종 25년(1699,기묘) 11월에 하동에 영계서원을 세우고 일두를 봉안하고 학봉을 배향하였다고 바로 서술하였다. 1935년에 간행된 <남계서원지>에도 숙종기묘(1699,숙종 25) 건립으로 바로잡아 서술하였다. 함양 출신 일두 제자 신고당 노우명의 증손 노륜의 사위, 성주 출신 문신 고촌 배정휘(1645~1709)가 영계서원 봉안문을 지었으니 창건 때 지은 것이다. 이연서원에 대해서 그 설명 “1586년(선조19)에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가 일두와 한훤당의 학덕을 기리고자 지방유림들과 협력하여 합천군 야로면 구정리에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신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두유집> 포증사전 선조 19년(1586,병술)에 한사 강대수(1591∼1658)가 합천 선비와 함께 선생과 한훤당을 사모하여 합천 야로현에 서원(이연서원)을 건립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해는 한사가 태어나기 5년 전이니 어불성설임을 알 수 있다. 그 부록에 <이연서원춘추향축문[강대수]>이 실려 있는데 <한사집>에도 <이연서원한훤당김선생봉안제문>, <이연서원일두정선생봉안제문>, <한훤당선생춘추향사축문>, <일두선생춘추향사축문> 등이 실려 있다. <한사선생연보>에 보면 한사 56세 때(1646,인조24) 이연서원을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이걸 보면 한사가 창건자로서 글을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병술년을 잘못 추정하여 선조 19년(1586,병술)으로 착각한 것인데 실상은 그 60년 뒤인 1646년(인조24,병술)이다. 병술년의 연대추정을 잘못하여 한사의 이연서원 창건 공로가 묻힌 것이다. 하동 영계서원도 기묘년(숙종25,1699)을 잘못 추정하여 두 갑자를 소급해 선조 12년(1579,기묘)으로 착각한 것이다. 비창건자가 창건자가 되고 후학의 글이 창건자의 글이 된 것이다. 둘다 청나라 연호 거부사태의 후유증이다.일두홍보관-동방오현과 문묘배향(文廟配享)“일두는 1574년(선조7) 부제학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의 건의로 문묘배향이 발의되었고, 시호는 문헌(文獻)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1610년(광해군2)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미암 유희춘의 발의로 문묘배향이 이뤄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암은 유생들의 문묘발의를 말리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1573년(선조6) 8월22일에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하여 네 분 유현(儒賢)을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한다는 말을 듣고서 “반드시 정일두(鄭一蠹 정여창)의 행장(行狀)을 태상시(太常寺)에 바친 뒤에 시호(諡號)를 논의하고, 시호가 하사된 뒤에 《유선록(儒先錄)》을 인쇄하여, 주상께서 자세히 보신 뒤에 배향을 청원할 수 있다. 질서를 무시하면서 서둘러서는 안 된다”라고 하며 대사성(大司成) 구봉령(具鳳齡)에게 편지를 보내 타일러 말리게 했다. 미암의 일기에 의하면 정여창 등 사현(四賢)의 문묘배향 청원은 1568년(선조1,무진) 4월15일에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十五日。太學儒生詣闕上疏。請趙光祖,李彦迪,金宏弼,鄭汝昌四先生文廟從享云云。<眉巖先生集卷之五 / 日記 刪節○上經筵日記別編 / 戊辰 皇明隆慶二年我宣廟二年 *1568,선조1,무진년> 그리고 일두에게 시호가 내린 것은 1575년(선조8,을해)이다. 도덕박문(道德博聞)을 문(文)이라 하고 총명예철(聰明睿哲)을 헌(獻)이라 한다고 주기하였다. 1577년(선조10,정축)에 이조좌랑 조원이 사신으로 와서 시호를 반포하였다.일두홍보관-역사적 평가-남계서원(灆溪書院)남계서원의 남자는 오리김치 람(蘫)이 아닌 물맑을 람(灆)을 써야 맞다. “1566년(명종21) 6월, 남계서원(灆溪書院)이라는 편액과 서책을 하사받게 되었으며, 이것은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이은 두 번째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1552년(명종7)에 개암 강익을 위시한 남계오현이 남계서원을 창건한 지 1년 뒤 1553년(명종8)에 영천의 유생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이 포은 정몽주를 향사하는 임고서원을 창건하고 1년 만에 완공하고 1554년(명종 9)에 사액을 신청하여 받았다. 영세한 함양 선비들의 10년에 걸친 서원건립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영천의 임고서원이 조선조 두 번째 사액서원이다. 조선조 세 번째 사액서원은 해주의 문헌서원이다. 문헌서원은 소수서원 창건자 신재 주세붕이 황해도 관찰사 시절 조선조 두 번째 건립한 서원이다. 사액은 임고서원 다음에 받아 세 번째 사액서원이 되었다. 생원(生員) 김택(金澤) 등의 상소를 예조에 내리고, 이어 전교하였다. "편액(扁額)과 서적(書籍) 등의 일을 한결같이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예대로 하라" 함양의 남계서원은 1566년(명종21)에 사액되었으니 소수서원, 임고서원, 문헌서원에 이은 네 번째 사액서원이다. 창건순으로는 소수서원, 문헌서원에 이어 세 번째다. 사당·강당 일체건립형 서원으론 소수서원이 첫 번째이고, 남계서원이 두 번째이다. 문헌서원은 원래의 사당에 강당을 추가하여 세운 것이다. 남계서원은 벼슬아치가 아닌 선비가 세운 서원으론 한국 최초이고 임고서원이 두 번째이다. 조선조 두 번째 건립 서원인 남계서원은 사찰의 권선문 같은 서원의 권선문으론 최초인 <천령서원수곡통문>을 남기었다. 정여창이란 조선인물을 최초로 제향하는 사당의 서원이기도 하고, 명성당이란 독자적 명칭을 최초로 부여한 강당 명명 서원이기도 하다.일두홍보관-일두의 학문일두의 학문에 대해서도 이미 학계의 결론이 난 것이다. 1920년 완간한 <일두속집> 잡저에 긴가민가하는 자료 「이기설(理氣說)」, 「선악천리론(善惡天理論)」, 「입지론(立志論)」을 일두의 저작이라고 고증 못하고 일단 수록하였다. 이것이 일두의 성리학 학설로 연구되어 회자되었다. 인제대학교 김영우 교수의 2013년 <일두 정여창의 성리설 고찰>이란 논문에서 곤재 정개청의 <우득록>의 글임이 입증되었으니, 이 세 편을 바탕으로 논술한 일두의 학문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다시 새롭게 서술되어야 한다. <우득록>의 글은 <당곡정선생실기>에도 혼입되었다. 경상대학교 최석기 교수는 <唐谷 鄭希輔는 어떤 인물인가>란 논문에서 당곡 정희보의 저작이라는 성리잡저와 역학도상총론의 학술을 논한 29편은 정개청의 글이라고 입증하였다. 한말의 세기말적 위작 풍조에 엮인 것이다. 문집 위조 전문 브로커의 농간에 당한 것이다.오류가 아닌 보충할 사적도 있다일두의 발자취는 일두연표인데 선생 39세 (1488,성종19) 섬진강 어귀에 악양정을 짓고 은거 강학한 사적이 누락되었다. 선생 41세(1490,성종21) 사섬시정 조효동이 효행으로 추천하여 첫 번째 벼슬살이 소격서 참봉에 제수된 사적이 누락되었다. 그리고 선생 45세(1494,성종25) 세자 연산군과의 불화로 조정에서 물러나 안음현감에 부임했다고 했는데, 어찌 신하가 군상과 불화할 수가 있나. 성현의 품성에 어울리는 표현이 아니다. 그냥 ‘설서를 물러나 외임을 청하여 안음현감으로 부임하였다’가 순화된 표현이다. 안음현감 부임후 제자를 길러 기묘명현 신고당 노우명(옥계노진부친)을 양성한 사적도 언급함이 좋다. 일두사후 중요 사적인 1552년(명종7) 남계서원 창건이 누락되었다. 1566년(명종21) 남계서원 사액도 주요한 사실인데 누락되었다. 2019년 남계서원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새로이 기록하여 선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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