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지않는 세태가 안타깝다는 어느 인스타그램의 글에 댓글을 단 적이 있다. 평소 댓글 다는 일은 없는데 피드를 올린 이의 책에 대한 애정이 느껴져서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인상깊었던 아래의 문장을 댓으로 달았다.
“그(그레고리우스)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 즉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독서를 하는지 하지 않는지는 금방 알 수 있으며, 사람 사이에 이보다 더 큰 구별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책으로 사람을 구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책이 뭐라고-’라는 대댓글이 달렸다. 책으로 사람을 구별하라고 이 문장을 소개한 것이 아니고 ‘신문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처럼 사람 사이의 어떤 현상으로서 그레고리우스의 ‘구별’에 대한 일말의 설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책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격하한 “책이 뭐라고...”가 할 말을 잃게 만들어 댓글을 삭제했다.
책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으니 누군가에게 책은 아무것도 아닌 것일지도 모르지만 책을 평생 곁에 두어야 하는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는 사람도 많다. ‘좋은 글이 지닌 마술과 같은 힘이나 광채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는 그레고리우스를 슬프게’ 했는데 어머니가 늘 책을 읽는 그를 못마땅해 했기 때문이다. 가끔 어떤 현상이나 사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레고리우스의 슬픔이 떠오를 때가 많았다. ‘책이 뭐라고’를 부언한 심리는 무엇이었을까.
나이지리아 출신의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아메리카나> 1,2권이 배송되었다. 이 작가의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치밀한 시선과 사회적 지성을 좋아하는데 또 다른 세계로 진입하게 될 기대와 설렘으로 이 책을 주문했다. 최근에 주문해서 쌓아놓은 책이 많은데 두 권을 더 보탰다고 생각하니 든든했다. 책은 인간사회의 다양한 모습과 마주치게 함으로서 시야를 풍부하게 만든다.
올해도 여전히 책을 많이 사고 많이 버렸다. 그 과정에서 내면에 축적되는 인간과 사회의 현상이나 향방과 태도, 자신도 모르게 깃드는 힘 같은 것을 은연중에 느끼곤 했다. 어떤 writer가 ‘글을 써서 무엇 하느냐’며, 연극이 시작되기 전 사람들이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세태를 자조하는 인스타 피드에는 창가에 라디오(시계인지도 모르겠다)가 놓여있는 사진을 올렸다. 라디오라면 아날로그의 회귀를, 시계라면 시간이 불러 온 너무 빠른 변화를, 그리고 창밖은 이 모든 것을 품은 잡다한 인간세상을 상징하는 것이며 이것들이 응축하는 바는 손에서 사라지는 책이라고 봤다. 왜 책은 눈에서 손에서 사라지고 있는가...
책은 교과서 밖의 세상을 가르쳐주고 사고를 확장 시키며 경험할 수 없는 수많은 세계에 대한 시선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지리의 위치란 각 국가와 인간사회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며 종교와 문명과 과학과 역사와 전쟁과 사회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지 심오하게 설파하는 것이 책이다. “책이 뭐라고”가 아니라 책은 그 ‘뭐’를 한참 넘어선 대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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