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에는 역사가 숨어 있다. 그래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음식은 그 가문의 역사가 되기도 한다. 어머니와 할머니, 윗대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유한 음식은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문화유산이 되었다. 전통음식은 계승해야 할 중요한 문화유산이지만 다음세대로 이어지는 전수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다. 집안의 전통음식, 옛 음식을 전수해 줄 함양의 숨은 손맛을 찾아 그들의 요리이야기와 인생래시피를 들어본다. <편집자말>
가족을 위한 요리, 나누는 요리
거실 한가운데에는 직접 주문한 전통 북 모양의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고, 발코니에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빛을 받으며 자라고 있다. 주방 한 쪽에는 천장까지 곧게 자란 식물이 있는데, 이 집의 시작과 함께하여 30여 년을 내리 키우고 있는 화분이다. 화분 옆을 따라 주방의 벽면을 살펴보면 수십 개의 다기를 진열한 나무 장식장이 있다. 그 위에는 직접 손으로 뜬 컵 받침과 테이블 보, 여러 색과 모양새를 가진 컵과 다기 용품들이 장식되어 있다. 대식구가 앉아 식사를 할 것만 같은 큰 식탁은 단란하게 둘러앉아 식사했을 가족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작은 소품부터 큰 가구까지, 집 안에 대부분을 보살피며 가꿔 온 일등공신은 바로 박양자 여사다. 유독 주방에서 사람의 손길이 많이 느껴지는 건 박양자 여사가 그만큼 많이 머무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진양하씨 31대손 며느리인 박양자 여사는 30여 년 전 함양읍에 있는 현재의 집으로 이사 왔다. 슬하에 2남을 두었으며, 줄곧 전업주부로서 가족들의 식사를 맡아 왔다. 요리 방송이나 식당에서 본 요리를 따라 해보며 가족을 위한 요리를 만들곤 했다. 불교에 귀의하여 봉사한 지 20년이 넘을 무렵에는 해인사 불교대학에서 들은 한 스님의 말씀을 계기로 스님을 집으로 초대해 공양청을 드리기도 했다. 스님 공양은 찬이 없더라도 집에서 내주는 게 스님께도 좋다는 말씀이었다. 이후 박양자 여사는 해인사에서 고생하신 스님을 위한 공양, 호주로 멀리 떠나는 스님께 드리는 공양, 등구사의 주지스님께 드리는 공양 등 인연을 맺은 많은 스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소박한 어린 시절, 북적이던 가족
박양자 여사는 원래부터 집으로 사람을 초대하거나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도 좋아했다. 다도를 배운 뒤에는 찻잔이 마르기도 전에 다른 손님이 연이어 오기도 했다고 한다. 여럿이 모여 음식을 나눠 먹는 게 익숙한 것은 어린 시절의 경험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다만 달랐다면 당시에는 지금처럼 다양한 음식이 풍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박양자 여사의 어린 시절, 밥상 3개를 펴야 할 만큼 식구가 많았다. 조부모, 부모, 삼촌, 5남매 총 10명이었다. 형제자매 사이에서 박양자 여사는 음식이 나오면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급히 먹기 바빴다고 한다. 음식이 풍족하지도 않을 때라 넘치게 만들지도 않았고, 밥상에 계란찜이 나오면 그게 대단한 음식이었다. 간식으로는 밀과 콩을 솥에 볶아주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딱딱한 콩을 씹는 재미로 먹었다. 그 외에 옥수수, 감자, 고구마가 보통의 간식이었고, 가끔 술빵을 만들어 먹는 날은 특별한 행사와도 같았다. 할머니의 감자 레시피, 그리고 감자탕수
소박한 음식들은 어린 그에게 맛있는 요리였다. 특히 할머니는 먹을 것을 달라며 조르는 손주들에게 감자 요리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배부르면서 따뜻한 감자요리는 맛있는 간식거리가 되었는데 재료는 간단하지만 만들기가 제법 까다로웠다. 지금과 달리 강판이 없어 직접 숟가락으로 감자를 긁어내어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박양자 여사의 할머니는 감자 간 것과 전분으로 반죽하고 소금으로 간을 해서 쩌낸 감자찜을 정해진 계량 없이 눈대중으로 만들었다. 당시에는 무슨 음식인지, 무엇으로 만든 건지도 몰랐음에도 어린시절의 박양자 여사는 할머니가 만들어준 간식이 쫀득하고 맛있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박양자 여사는 23살이 되던 해에 할머니와 살던 집을 나와 가정을 꾸렸다. 첫째 아들이 10살쯤 되던 때에는 아이에게 해줄 간식을 고민하다가 할머니의 감자요리를 떠올렸다. 이에 할머니에게 어린 시절에 해주시던 감자 요리에 대해 물었고, 재료를 계량하여 지금의 레시피로 만들었다. 시골에 사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먹을 것이 없어 ‘감자찜’이 맛있는 간식이었지만, 도심의 아이들에게는 그저 밍밍한 음식이었다. 아이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탕수육 소스에 감자찜을 졸여 만든 감자탕수 레시피를 개발했던 건 이 때문이었다. 박양자 여사는 “감자찜은 밍밍한데, 이건 맛있다며 먹더라”라며 당시 가족들이 맛있게 먹던 모습을 회상했다. 할머니로부터 이어져 온 음식을 가족과 나누는 그녀의 모습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다.
대를 이은 따뜻한 마음
첫째 아들이 군대를 제대했을 무렵 돌아가신 할머니는 생전에 예뻐하는 손녀의 집에도 줄곧 놀러 오셨다. 할머니는 나이가 들어가며 점점 전처럼 요리하는 게 어려웠고, 박양자 여사는 할머니를 위해 손수 식사를 차려드렸다. 어릴 적 할머니가 손주를 위해 요리를 해주셨던 것처럼 손녀는 할머니를 위해 요리했다. 특별한 요리가 아니라 그냥 밥이었다고 하지만 겸손한 그를 떠올리면 아무 음식이나 내어드리진 않았을 거라 생각하게 된다.
평생을 그저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게 익숙했던 박양자 여사는 요리 레시피를 소개하는 것조차 별 것 아니라며 겸손했다. “내가 이걸 만들어 가지고 맛있게 먹는 걸 생각하면 기분이 좋죠. 행복해지는 거죠”, “요리라기보다는 그냥 집에서 가족들한테 해주는 거지”라며 말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요리와 바느질 솜씨를 그대로 물려받은 박양자 여사는 자신에게 간식을 해주시던 할머니처럼 가족을 위한 따뜻한 마음도 물려받은 듯 했다. 여느 때처럼 가족을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할 거라는 박양자 여사에게 요리는 보통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김소연 인턴기자
<감자찜 레시피>
<재료>감자찜 (감자 5개 분량)노란색, 빨간색 파프리카 반 개씩양파 1개, 당근 2/3개, 오이 반 개 표고버섯(4개)과 다시마 우린 물 250ml간장 50ml, 식초 50m, 설탕 2큰술, 전분 3큰술, 통깨
<순서>1. 채소를 감자찜 사이즈에 맞게 작게 썰어준다.2. 냄비에 표고버섯과 다시마 우린 물 250ml를 넣는다.3. 간장과 식초를 50ml씩 넣는다. (각각 다시마 우린 물과 5:1 비율)4. 설탕 2큰술을 넣는다.5. 감자찜을 넣고 단단한 야채부터 순서대로 넣는다.6. 다시마와 우렸던 표고버섯 3개를 썰어 넣어준다.7. 전분 3큰술에 표고버섯과 다시마 우린물을 섞어 녹여 준다.8. 전분 섞은 물을 냄비에 넣고 끓을 때까지 저어준다.9. 걸쭉해진 감자탕수를 접시에 옮겨 담고 통깨를 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