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중학교 때 교내 미술부 활동을 하면서 전국 대학에서 주최하는 전국 중·고 미술대회에 빠짐없이 참가했었다. 서울, 대구, 경남권 대학위주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매년 빠짐없이 참가했었다. 참가 부문은 풍경사생화로 수채화를 했었다. 중학생 때에는 경험도 중요했고 고등학생 형들의 실기 모습을 현장에서 보고 배우기 위함도 있었다. 또 학교 수업을 땡땡이 치고 미술대회에 나가는 특별한 재미가 있었다. 요즘은 미술대회가 주말에 열려서 학교 수업에 지장을 주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미술대회가 대부분 금요일에 개최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수업을 빼고 미술대회에 나갔었다.
그 시절 평소에는 놀거리가 많지 않아서 틈틈이 서점에 가서 미술서적을 이것저것 보는 일이 많았다. 주로 데생자료집을 많이 보았는데 수채화나 서양화 작품집도 가끔 보기도하였다. 그러던 중에 르느와르 작품집을 보게 되었고 왠지 모를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나도 나중에 르느와르 같은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거 같다. 중학생의 수준에서는 르느와르의 작품을 전문가의 시선으로 보고 평가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나의 얄팍한 수채화 기법에 접목시켜 그려보고 싶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었다. 르느와르 그림에서 포근함을 느꼈고, 정교하지 않은 붓 터치의 자유로움에서도 정확한 형태와 움직임을 포착해 내는 표현력에 감동을 받았었다. 또한 다양한 색을 과감하게 덧칠하면서 동적인 묘사력이 어린 나에게 큰 자극을 주었었다. 뒤늦게 이것이 인상주의 화법임을 알게 되었다.
오귀스트 르느와르는 1841년 프랑스의 리모즈에서 한 양복점집 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 프랑스 파리로 이사를 했고, 그의 집안은 가난하여 13살 때부터 도자기 공장에 취직하여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일을 하였는데 그는 쉬는 시간이나 일이 끝난 후에도 틈틈이 데생을 연습하였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여파로 도자기에도 인쇄기술이 적용되어 도공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손부채나 깃발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르느와르는 돈을 열심히 모은 뒤 21살에 화가의 꿈을 품고 에콜 데 보자르 아틀리에 입학하였다. 그의 스승은 스위스 태생의 글레이르이다. 그를 통해 모네, 시슬레, 바지유 등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인상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글레이르는 자신은 고전주의적인 화풍이었으나 학생들에게는 비교적 진보적이고 자유롭게 그리도록 가르쳤다. 인상주의자들을 포함하여 다른 화가들은 미술을 자신들의 내적인 표현과 자아 도취되어 독특한 기법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르느와르는 그림 그리는 자체를 매우 즐거워했으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도자기나 손부채에 아름답고 유쾌한 그림을 그리던 시절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르느와르는 자신의 그림에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대개 일상생활이고 특히 유희를 주제로 한 것이 많다. ‘인생은 끊임없는 유희’라고 했다. 이처럼 낙천적인 르느와르는 늘 즐거운 장면만을 그렸다. 특히 여인들을 즐겨 그렸으며 모두 풍만하게 그렸으며 독서, 춤, 파티, 목욕 등을 주제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중이 좋아할 그림을 그리고 대중의 취향을 파악하여 화풍을 발전시켰다. ‘대중이 즐기고 좋아하는 예술’이야말로 르느와르가 평생을 통해 추구한 예술 세계이다.
1880년대에는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후 고전적인 라파엘주의로 돌아가게 된다. 그는 나중에 류머티즘에 걸려 붓을 들기에도 힘들 만큼 병마와 싸웠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붓을 들기도 힘들어질 정도임에도 그는 자신의 손에 붓을 묶어서 그림을 그리는 열정을 보였다. 그가 죽기 몇 시간 전에도 간병인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화병을 준비해 달라고 할 정도로 그는 열정적이었고 진심이었던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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