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할 수 없는 더위도 힘들지만 연일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폭염경보 문자 또한 피곤하기는 마찬가지다. 잠시라도 더위를 잊을만한 방법은 없을까? 뭐니 뭐니 해도 한 여름 더위를 잊기 위한 전통적인 방법 중의 하나는 공포 영화나 무서운 이야기가 손에 꼽히기 마련이다. 해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 이야기를 소개해본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악명 높은 도둑이다. 그는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 강가 언덕에 집을 짓고 살았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의 집에 철로 만든 침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아서 자신의 침대에 눕힌 후에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억지로 몸을 늘려서 죽였고, 침대보다 크면 큰 만큼 머리나 다리를 잘라서 죽였다. 그런데 그 침대에는 길이를 조절하는 비밀 장치가 있어서 어떤 사람도 그 침대에 딱 들어맞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침대에 누운 사람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처럼 잔인한 악행을 저지르던 그는 훗날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게 자신이 저지르던 악행과 똑같은 방식으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얼마나 공포스럽고 무서운 침대인가? 그야말로 죽음을 부르는 침대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우리 삶의 저변에 바로 이처럼 공포스럽고 무서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곳곳에 널려 있다는 것이다. 프로크루스테스는 테세우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침대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이 공포의 침대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하나쯤은 감춰 두고 있을 것이다. 길이 조절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차가운 철 침대는 우리 모두의 자아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프로크루스테스가 행인의 키를 억지로 침대에 끼워 맞춰서 그들의 목숨을 빼앗았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삶의 기준과 가치관에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양식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횡포와 아집과 독단을 일삼을 때가 있다. 흔히 하는 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속에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차가운 철 침대’가 숨어있다. 내가 바쁘게 운전할 때 다른 사람이 끼워주지 않으면 우리는 불같이 화를 내고 짜증을 낸다. 하지만 다른 운전자가 내 앞을 급하게 추월해서 끼어들 때 전조등과 경적을 동시에 작동시켜서라도 확실하게 경고를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작동한 결과다.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국민의 힘은 국민의 힘대로 자기만의 정치 논리와 가치관이 있고 자기 정당성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치력의 무게 중심이 횡포와 아집과 독단에 치우쳐서 소통을 버리고 일방통행만 고집한다면 그 역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고 말 것이다. 동양고전에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비슷한 말이 있다. ‘삭족적리’(削足適履), 즉 발을 깎아 신발에 맞춘다는 무서운 사자성어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손자 회남왕 유안(劉安)의 저서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 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신발이 작다면 신발을 고치는 것이 상식 중의 상식인데 신발이 작다고 발을 깎아 버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공포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삭족적리’와 같은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또한 더 이상 작동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이 시대는 신발이 작다고 발을 깎아 버리고, 몸이 침대에 맞지 않는다고 몸을 늘리거나 잘라버리는 공포영화 같은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무엇이 원인일까? 각자가 버리지 못하고 숨겨놓은 낡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때문이 아닐까? 내 생각, 내 경험, 내 지식, 내 가치관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눈에서 티끌을 빼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이미 악명높은 ‘프로크루스테스’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다르고, 경험치가 다르고, 지식의 정도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을 재단해 버리면 폭염보다 더 무서운 공포영화는 일상이 되고 말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용납하자! 나와 너의 다름을 인정하고, 우리와 너희의 다름을 인정하자! 보수와 진보의 다름을 인정하고 용납하자! 다름을 인정하고 용납하기 시작할 때 우리 안에 있는 낡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점점 사라지고 더 이상 공포영화와 같은 상식 밖의 일은 만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끝으로 우리 안에 있는 낡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버리기 위한 작은 소망을 담아 노랫말 하나를 소개해본다.[오늘 나는]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 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 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 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옹졸한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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