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요리를 잘하셨습니다. 원래 솜씨도 좋으셨지만 늘 새로운 요리에 도전하셨습니다. 요리 교실도 다니면서 가족에게 더 맛있는 요리를 해주려고 하셨습니다. 엄마가 식구에게 꼭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히 요리를 좋아해서만이 아니었습니다. 엄마는 어렸을 때 형편이 어렵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늘 일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렵사리 들어갔던 고등학교도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그만두었습니다. 자퇴한 다음 날부터 바로 일을 시작했는데 그 일은 주로 남자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교복을 입고 교실에 있어야 하는 시간에 밖에서 그런 힘든 일을 하면서 얼마나 억울했을까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얼굴이 안 보이도록 머리에 손수건을 써서 아는 사람, 친구와 마주치지 않도록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제게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절대로 당신의 양부모를 원망하는 말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오히려 속상해서 그런 부모가 밉지 않았는지 물어봤던 것 같습니다. 엄마는 저에게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고, 절대로 자신의 부모님이 나쁜 부모이기 때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엄마는 학교생활을 하면서 공부도 잘하고 늘 예의 바르며 친구를 상냥하게 대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친구가 많았고 후배들한테도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연히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습니다. 10년 정도 전에 제가 친정에 가 있었을 때 엄마를 모시고 절에 갔습니다. 그때 엄마는 치매에 걸려서 기억이 오락가락했습니다. 사람과의 대화 자체가 어려워서 아는 사람은 많아도 인사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습니다. 그때 보기 좋게 차려입으신 교양 있어 보이는 할머니께서 “다부치씨(엄마의 결혼 전 이름) 아니에요?” 라며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여기서 또 신기했던 것은 엄마의 눈에 생기가 돌며 “예 맞아요” 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대답을 하시는 건지 그냥 대답을 하시는 건지 몰랐지만 상대의 이야기에 맞춰서 여고생 때 이야기를 잘하셔서 놀랐습니다.   그러자 엄마보다 학년이 하나 밑이었다고 하는 후배분들도 오셔서 세분이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싱글벙글 웃으며 맞장구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기억은 없었을 수도 있지만 기분은 아주 좋아 보이셨습니다. 저와 딸들에게 엄마 친구분께서 “너희 할머니는 얼마나 머리가 좋았는지 몰라. 게다가 누구에게도 친절해서 후배들에게도 인기가 많았고 할머니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는 아주 자랑스러웠습니다. 꽃피는 학창 시절을 아쉽게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였지만 학교 동창회 때면 꼭 초대장이 보내져 왔습니다. 보통 졸업하지 않은 학생에게 동창회 초대장은 보내지 않는다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동창회 초대장을 보낸 친구들의 마음만 봐도 엄마가 여고생 때 얼마나 믿음직한 학생이었는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어려운 청년 시절을 겪다 보니 엄마는 미래에 자신이 꾸리게 될 가족에 대한 기대와 꿈이 조금씩 커져갔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족 모두가 함께 모여서 밥을 먹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소원이 가장 크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직장에 다니시면서 아무리 바빠도 가족의 식사에 신경을 쓰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단한 것은 저희 삼남매의 학교 도시락을 17년 동안 월~금요일 매일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매일매일 점심시간이 기대될 만큼 맛있는 도시락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이제는 급식을 먹는 시대가 되고 간편하게 사 먹는 시대가 되어 저도 자주 이용하지만 엄마의 도시락만큼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음식은 아직 만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또 엄마께서는 인스턴트를 거의 쓰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엄마가 되어보니 ‘이렇게 편리한 것을 왜 안 쓰셨을까?’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엄마가 ‘우리 가족이 건강한 것을 먹었으면 좋겠다.’라며 음식에 담아낸 가족을 향한 사랑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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