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막내아들이었던 이방석의 세자 책봉 문제로 인해, 조선은 건국 7년 만에 왕자 주도의 반란이 발생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제 1차 왕자의 난’, 흔히 무인정사라고 하는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친 이성계 세력이자 이방석의 지지 세력이었던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의 개국공신들이 다수 사망하게 되고, 태조 이성계는 자신이 세운 나라에서 사실상 모든 실권을 잃고 물러나게 된다.   그런데 이 대규모 반란으로부터 고작 4년 후, 속칭 ‘조사의의 난’이라 불리는 또 하나의 대규모 반란이 터진다. 그런데 오랫동안 이 난은 대중에게 알려진 이름처럼 조사의가 일으킨 난으로 여겨졌으며, 이성계는 단지 거기에 이용만 당했을 뿐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왔다. 하지만 실제 난의 진행 과정을 태종실록에서 살펴보면 상당한 의문점들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그 의문점들은 하나같이 ‘이성계가 난의 주동자’라는 메시지를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의문점을 두고 이성계의 반란 주도 설을 내세울 수 있는가? 그것은 앞서 말했듯 실록에 나와 있다. 다음은 태종실록 4권의 태종 2년 12월 3일 임자 2번째 기사이다. 정용수(鄭龍壽)·신효창(申孝昌)을 순위부(巡衛府)에 가두었다. 용수와 효창은 승녕부(承寧府) 당상관(堂上官)으로서 태상왕(太上王)을 호종(扈從)하여 동북면에 이르러 조사의(趙思義)의 역모(逆謀)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정용수와 신효창이 옥에 갇힌 이유가 ‘태상왕(이성계)를 호종하여 조사의와 함께 해서’라고 적고 있다. 또 다른 증거를 보자.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4월 27일 정미 1번째 기사이다. “조사의(趙思義)의 당(黨)이 신효창과 정용수를 태조(太祖)에게 참소(譖訴)하여 말하기를, ‘다른 마음이 있으니, 청컨대 이를 죽이소서.’하였으나 태조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성계의 내관이었던 김수징이 반란 진압 후의 문초 과정에서 진술한 내용이다. 조사의가 청했으나 태조가 거절했다는 대목으로 보아, 둘 중 누가 더 서열이 높았는지가 바로 보인다.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반란 기간 동안 이방원의 행동이다. 이방원은 반란 직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다가, 이성계의 위치를 알린 회양부사 김정준에게 그 ‘군공’을 치하하며 말을 하사한다. 그리고 얼마 후, 이방원은 반란 시작 후 16일째에 수도 개경을 떠난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기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거가(車駕)가 원중포(元中浦)에 머물렀다.’ 여기서 원중포는 조사의의 주력군과 한참 떨어진 곳으로, 이방원에게 다른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원중포에 온 지 4일 후, ‘거가(車駕)가 원중포(元中浦)에서 이르렀다.’ 라는 기사가 실린다. 즉 이방원이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거짓말처럼 조사의의 반란군은 혼란과 두려움 등으로 자멸한다. 결국 앞선 정황들을 모두 고려해 볼 때, 태종이 반란 발생 20일만에 원중포에 있는 태조를 기습하여 사로잡은 뒤 의도적으로 그 정보를 반란군에게 흘린 채 귀환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왜 실록은 이렇게 간접적으로만 이성계의 반란 주도 사실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것은 당시 이방원 정권이 ‘이성계가 빼앗긴 권력을 되찾으려 자신을 몰아낸 아들 이방원과 국가의 존망을 건 내전을 벌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감추려 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조선 왕조가 개국부터 콩가루 집안임을 인증해버리는 꼴이나 다름없으므로, 조사의를 반란군 수괴를 몰아 죽이고 이성계와 난의 연관성을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기록을 낸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실록이 당시 저술가들의 압력조차 이겨내고 실제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은, 숨기려 해도 결코 숨길 수 없는 역사가 있다는 교훈을 떠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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