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활 속에서 빛이라는 존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한 시도 빛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빛과 그늘, 그림자의 관계를 유심히 관찰하지 않는다. 또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자연을 표현하고자 할 때에는 빛의 흐름을 다시 보게 되고 느낌을 표현한다. 모네는 1872년 그린 그의 대표작이자 인상파의 이름의 기원이 된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을 화단에 내놓았다. 그림을 본 화가들은 인상만 그렸을 뿐이라고 조롱하면서 인상파(Impressionist)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그렇게 붙인 별명이 유파의 정식 이름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다른 인상파 화가들조차 빛의 변화를 포착하는 데에만 집중해서 대상 자체의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고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인상주의의 한계를 자각하고 화풍을 바꿀 때까지도 모네는 끝까지 인상주의 화풍을 고수했다. 인상주의를 창시하고 인상주의를 끝까지 지킨, 실로 인상파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오늘날 인상파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작품의 대부분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모네는 풍자 만화가였다. 고향인 르 아브르에서 풍자화를 그려가며 돈을 벌었는데 당시 모네가 그린 풍자화 한 점의 가격이 10프랑~20프랑이었다고 한다. 당시 노동자의 일당이 5프랑이었던 걸 감안하면 청소년이 그린 그림이 그림 값을 넉넉하게 받은 셈이다. 풍자만화가로 살아가던 어느 날 모네의 풍자화를 본 화가 외젠 보댕이 모네를 제자로 삼고 싶다고 한 것. 모네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지만 용기를 준 보댕을 스승으로 받아들인다. 모네가 그린 그림을 보면 오랜 관찰을 통한 섬세한 묘사가 두드러진다. 이후 보댕을 떠난 모네는 한 화실로 들어간다. 그 화실에는 후에 인상파로 불릴 그의 동료들 마네, 피사로, 드가, 르누아르가 있었다. 모네의 루앙성당, 짚더미 연작에서는 같은 대상이라도 시간, 날씨, 계절에 따라 빛과 색채의 변화를 잘 포착하였다. 세월이 흐르고 인상파의 작품이 인정받기 시작함에 따라서 모네도 정원이 딸린 저택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졌다. 말년에 그린 작품은 대부분 지베르니의 정원을 소재로 한 것이다. 모네는 젊은 시절 지베르니의 풍경에 감탄하면서 “내가 이 다음에 큰돈을 벌면 지베르니에 집을 얻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늙어서도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았는지 모네는 정원 꾸미기에 몰두했다. 그의 유명한 수련 연작도 지베르니에 있는 자택 정원에서 그린 것이다. 모네의 수련 연작은 1926년 죽을 때까지 27년에 걸쳐 300여 점의 작품을 그렸다. 젊은 시절부터 바라왔던 곳에 집을 얻고 부유한 생활을 하던 모네였지만 그에게 큰 시련들이 닥친다. 가난했던 시절에 함께 배고픔을 견뎌냈던 친구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고 모네 본인도 백내장에 걸려 다시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모네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데도 빛에 따라 달라지는 정원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1925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나의 인생은 내가 하는 일, 즉 오로지 내 그림만을 생각하여 지나가고 있습니다” 모네의 일생을 잘 드러내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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