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마당에 있는 시간이 많습니다. 정원의 장미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어 아침에 눈을 뜨면 뜨거운 커피 한잔 들고 마당으로 나갑니다. 저녁 먹고도 늦은 시간까지 장미 향기에 취해봅니다. 사실 딱히 할 일이 없어도 하루의 상당 시간을 마당에서 어슬렁대고 있습니다. 지난 해 새로운 장미를 많이 심었기에 이런 날이 오기를 많이 기다렸거든요. 오랜 기다림 끝에 독일장미 라이온스로즈와 프랑스 장미 에덴로즈85가 활짝 피었습니다. 특별히 애정이 가는 장미이기에 사진도 많이 찍어줍니다. 수년간 친하게 지냈던 가르텐 슈파스(정원의 즐거움)도 화려하게 피고 있습니다. 오클라호마, 로젠파치나치옹, 랩소디인블루, 하루가제... 아직 이름도 익숙하지 않은 수많은 장미들이 다투어 피는 정원을 거닐며 어쩌면 이 풍경이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 배경음악을 깔아주어야겠다는 재밌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좋아하는 말러의 심포니 3번 2악장이 떠올랐습니다. 연주시간 100분이 넘는 말러의 대 교향곡 3번 중 2악장 (tempo di menuetto very measured)은 연주시간이 10분 정도 되는 짧은 악장입니다. 내가 만약 이 영화의 음악감독이라면 장미가 만개한 정원의 배경음악으로 이거다 하고 선정하겠지만 작곡가인 말러는 어떤 의도로 썼을까 싶어 자료를 검색해보니 내 느낌이랑 완전 일치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정원에 꽃이 만개한 풍경과 음악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아마 클라리넷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침 햇살에 장미가 벌어지는 모습을 느리고 우아한 춤곡의 템포로 목관이 연주하며 시작하는 이 장미 악장(?)을 들으면 그냥 장밋빛 인생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현실은 오늘도 곶감 택배 포장하고,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포스팅도 하고 쇼핑라이브 방송까지 해야 하지만요. 개똥을 모아 장미 화단에 묻어 주기도 하고 감나무 과수원에서 풀 베고 방제하고 낫질하며 땀 흘리는 것은 다가오는 여름날의 일상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화려한 날도 잠깐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꼭, 항상, 어김없이, 결국, 무조건 비가 내리거든요. 물론 농사를 위해 비가 내려야하지만 이제 절정인 장미에게는 조금 유감스런 일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올해도 어김없이 사흘 비가 이어져 엄천강이 엄청강이 되었습니다. 강물이 보를 넘쳐흐를 정도가 되었으니 장미악장을 들으며 즐겼던 장미꽃들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겹겹으로 화려하게 벌어진 장미꽃들이 불어터진 두루마리 휴지처럼 무너집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신기하게도 비가 올 때 더 예뻐 보이는 장미가 있습니다. 아치를 뒤덮은 덩굴장미 로얄바카라는 꽃잎이 별로 많지 않지만 특별한 미모를 가진 장미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이름에 왜 로얄이 붙었는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일 정도이고 한 마디로 귀족스럽습니다. 로얄바카라는 벚꽃처럼 떨어집니다. 봄비를 맞은 벚꽃처럼 눈부시게 떨어지는 모습은 장미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나는 비 오는 날에도 우산을 쓰고 로얄바카라 꽃비 내리는 아치 아래서 장미악장을 들으며 좋은 시간을 보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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