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후, 수많은 민간인들은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국가로부터 보호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참히 희생됐다. 함양군은 지리산과 덕유산을 잇는 지리적 여건으로 빨치산이 활동하는 본거지가 되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이후 공비토벌작전 중 빨치산을 도왔다는 명분으로 함양에서는 민간인 학살사건이 자행되었다. 함양군 읍면 민간인 80여명을 포함해 보도연맹, 연고지가 밝혀지지 않은 이들까지 포함하면 무고한 희생자가 300여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중 함양민간인 희생사건 86명, 강정금 상해사건 1명, 부산형무소 사건 16명, 국민보도연맹사건 29명, 적대세력사건 29명, 전주형무소사건 2명, 산청·거창 등 민간인희생사건 2명, 서부경남민간인 희생사건 15명, 전북지역민간인 희생사건 1명 총 181명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으로 명예를 회복한다. 하지만 70여년 아픈 기억을 안고 살아 온 유족들의 설움은 아직도 깊기만 하다. 희생자 유족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그날의 진실이 모두 밝혀지는 날까지 우리는 그들의 기억을 붙잡아 둘 의무를 갖게 됐다. 그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것은 이르다하기엔 너무 늦었고 늦었다고 하기 보단 다행이었다. 아픈 기억을 들추어내야 했던 힘든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증언해 준 유족분들에게 다시한번 감사함을 전한다.   수동면 치라골 양민학살 사건<1949년 음력 윤7월28일>   수동면에서 제일 오지인 치라골에 공비들이 들어와 밤마다 주민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 밥을 해내라고 위협을 하여 밥을 해 준 것 뿐인데 1949년 7월28일 마을에 경찰들이 몰려와 주민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후 주민 18명의 명단을 불러 끌고 가서 7월29일 함양읍 당그래산에서 총살시켰다. 18명 중 총살당한 피해자는 17명이며 1명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앞 못보는 할머니가 유일한 가족 아버지가 계셨다면 달라졌을 인생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를 잃은 임채동씨의 인생은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다. 임씨의 어머니는 남편을 잃고 개가해 가 버리고 누이도 어느 날 갑자기 경기를 하여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임채동씨 곁엔 앞을 볼 수 없는 할머니뿐이었다. “치라골에서는 18명이 끌려갔는데 그중 한명 임기택씨가 살아나왔어. 나머지는 한 날 한시에 잡혀가서 죽었지” 이곳 치라골은 지금도 버스가 하루 두 번 밖에 들어오지 않는 오지다. 당시에는 신작로도 없이 차가 다닐 수 없는 좁은 길로 걸어 다녀야 했다. “그때만 해도 수동에서 여기까지 좁짝한 길을 걸어 다녔지. 여기 길이 오데 있어. 차도 안다녔어. 여기는 거창 넘어오는 길도 없었어, 소릿길만 있지. 신작로가 어디 있오. 저녁으로 빨갱이들이 이 길을 걸어 다닌 거라. 총을 들이밀고 밥 안 해주면 내가 총에 맞아 죽을 판인데 밥을 안 해 줄 수 있나”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아야 했다. “나는 만 다섯 살이라, 여섯 살 되던 해거든. 다른 기억은 없어.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없지. 아버지 얼굴도 똑띡이 모르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들은 얘기라” 수동면 도북마을사람들은 희생자들이 죽음을 당한 당그래산에 가서 유골을 모셔와 합동묘를 썼다. 치라골 사람들도 묘를 쓰겠다며 당그래산으로 갔지만 허사였다. “우리끼리 묘를 쓴다고 갔었데. 남자들 여남은 명이 발굴하러 갔는데 당그래산은 이미 개발돼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기라. 마을 사람들이 묻힌 부지를 몰라. 한 이십년 됐을 때 갔어. 근데 못 찾았어. 아무것도 안 나오고 얄궂은 신발짝 하나 찾고 유골 발굴도 못했지. 어디 구덩이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도 없고”임채동씨의 할아버지도 외동아들, 아버지도 외동아들이었으니 그에겐 가까운 친인척도 없다. 임채동씨의 누이가 있긴 했으나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그 당시 한 마을에 몇 있던 집안사람도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여서 임채동씨를 도와 줄 여력이 못되었다. 어린 나이에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임채동씨는 굶기를 밥 먹듯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했다. “앞도 안 보이는 할머니랑 살았어. 할아버지가 외동아들인데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랑 둘이 살았어. 나 산거는 말도 못해 넘에 집에서 살고 넘에 집에 일해주고 먹고 살았지. 재산도 없고 밭떼기가 하나있나” 할머니와는 십여년을 함께 살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15살이 된 임채동씨는 완전히 혼자가 됐다. 어린 나이에 남의 집 일을 하루 종일 해봐야 보리쌀 한줌밖에 얻지 못했다. “어리니까 꼴이나 베다주고 밥이나 얻어먹고. 품삯 받아봐야 보리쌀 1킬로도 안줘. 지금 같은 세상이면 그리 힘들지는 않았겠지, 아무것도 없으니 영세민이 되어 나라에서 돈도 주고 쌀도 주고 했을테니. 그 때는 나라도 못살 때라” 학교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임채동씨는 오늘 하루 배를 곯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도랑가에서 열매를 따 먹고 쌀이 없어서 등겨만 팔아다 먹었다. 개떡은 고급 음식이었다. “계속 치라골에서만 살았지. 배운 것도 없는데 어딜 나가 살겠소. 초등학교 문 앞에도 못 갔는데” 치라골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치라골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임채동씨는 살아가기보다 평생을 살아내야만 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임채동씨 인생도 달라졌을 것이다. 국가도, 부모도 보호해 주지 못한 어린 임채동씨의 삶은 외롭고 힘들었다. “너무 외롭게 자랐지, 나 산거는 얘기도 못한당께. 책을 쓰면 짊어지지도 못한다 안하요”이 기사는 증언자의 구술을 그대로 살리고자 방언을 사용하였습니다. 구술 내용 중 날짜, 나이 등에는 구술자의 기억에 외곡이 있을 수 있으며 전체 내용 또한 증언자의 기억을 바탕으로 기록됐습니다.   임채동 유족   ■ 이름 : 임채동■ 희생자와의 관계 : 희생자의 아들■ 생년월일 : 1944년 3월11일 / 만 79세■ 성별 : 남■ 주소 : 경남 함양군 수동면 치라골길 103■ 직업 / 경력 : 농업   함양양민희생자 치라골사건 희생자 정보■ 이름 : 임기택■ 생년월일 : 모름■ 사망일시 : 1949년 음력7월28일 (당시 25세 가량)■ 성별 : 남■ 결혼여부 : 기혼■ 주소 : 경남 함양군 수동면 치라골44번지■ 직업 / 경력 :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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