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츠와나족과 응구니족의 언어에는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뜻의 ‘ga e se motho’ ‘a ku si muntu’라는 말 표현이 있다고 한다. 이는 사람다움을 갖추지 않은 것을 ‘사람이 아닌 것’으로 분별하는 그들의 풍습에서 나온 말이다. 사람 모양으로 태어난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되어가는 Becoming(되어감)의 과정을 중시한다고 한다. 아프리카 부족들은 공동체 안에서 관용, 자비, 존경과 같은 고양된 가치와 규범을 따라야 비로소 사람다움(Personhood)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람다움과 사람답지 못함에 대한 분별 의식은 한국인의 정신과 문화에도 아주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다. 사람다움으로 살기는 자녀 교육이나 상호 관계에서 삶의 근간으로 추구된다. 단군신화의 홍익사상(세상을 널리 이롭게 함)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움으로 사는 것인가에 대한 한국인의 뿌리깊은 정신적 지표이다. 특히 한국인들의 마음 중심에는 ‘양심’이라는 개념이 상당히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삶의 행동 양식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있다. 더구나 한국의 근대사 속에서 핍박을 받던 민중이 자발적으로 꽃 피워 낸 동학의 시천주(하늘처럼 모심)사상은 홍익 사상과 더불어 사람됨에 대한 한국인의 철학적 의식을 지극히 높은 경지로 끌어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한반도에 ‘사람다움’을 모르는 ‘ga e se motho(사람 아닌 것)’들이 거세게 득시글거리고 있다. 오로지 권력과 부를 추구하는 것이 그것들 존재의 기능과 목적인 터라 ‘죄’를 서슴지 않는다. 선량한 사람들의 양심을 우롱하고 자기들의 영악함을 지혜이며 총명인양 거짓 선전한다. 선량한 사람들의 생명 에너지 집적물(가령, 세금 또는 생산과 소비 활동에 의한 잉여가치)을 얼마나 많이 갈취할 것인가가 그것들의 비장하고 끈질긴 목적이다. 자기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전쟁이나 기근이나 펜데믹과 같은 대규모의 사람 살상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을 그것들은 잘 알고 있다. 요즘 같아서는 그것들의 작태가 너무 드세어져 물과 나무와 공기(바람)와 불 그리고 생명기운으로 지탱되고 있는 지구 에너지 장 전체가 뒤틀리고 있다. 그러한 와중에 한 젊은 청년이 분연히 일어나 사람 아닌 것들의 작태를 ‘죄’라 외쳤다. 선한 사람들의 마음을 곤혹하게 하는 죄의 속성을 스스로 치열하게 분별해 낸 청년이었다. 자기 조부모의 죄와 가족 친지들이 지은 과거와 현재의 ‘죄’를 자신의 영혼이 짊어져야 하는 쇠스랑으로 여기면서 광주를 찾아가는 청년이었다. 아물길 없는 광주의 상처를 그 어린 손으로 보듬어 보려는 몸짓이 애처롭기만 했다. 길고 어두운 의식의 터널에서 홀로 지독한 외로움을 견뎌내야 했던 그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 몇 자락을 붙들어서 자기 양심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상처받은 이 땅의 수많은 삶과 영혼들이 치유되기를 진정한 가슴 울림으로 소망하고자 유튜브를 통해 매일 성경책 함께 읽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치유와 사랑의 행적을 더듬어 나가는 그 청년의 몸짓은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참 애틋한 분투이다. 그러나 그의 몸짓과 행함은 분명 ‘사람됨’을 향한, ‘사람다움’을 이루고자 함이니 이를 나는 우리 시대의 ‘희망’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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