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봄이다. 유난히 춥고 길었던 겨울도 어김없이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떠났다. 산은 산대로 들은 들대로 거리는 거리대로 봄사태다. 매화, 산수유, 벚꽃.... 꽃빛이 요란하다. 새순도 이에 질세라 연두의 생명을 뿜어 올린다. 이런 봄 향연을 즐기지 않을 수 없다. ‘화란춘성 만화방창’ 봄 구경에 사람들은 지난 겨울의 시름을 날려 보낸다. 봄이 있어 살만하고 봄이 있어 그저 행복하다. 그러나, 이 흐드러지는 봄을 즐길 여유없이 더욱 바빠지는 사람들도 있다. 읍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너르디너른 논밭에 올해 농사를 위해 애쓰는 농부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논에 물대기 전에 흙을 갈고 밭에 거름을 넣고, 씨를 뿌리고 감자를 심고... 오죽하면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농번기라고 하였던가. 논밭을 지나갈 때면 자연의 순리에 맞추어 움직이는 농부의 모습에 경외심과 동시에 미안함을 느낀다. 부디 올 한해에도 농부들의 노동이 헛되지 않기를, 풍성한 수확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한다.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어떤 그림을 보았을 때, 이 그림은 고흐의 그림이네, 이 그림은 모네의 그림이네... 라고 할 수 있다면 그 화가는 성공한 사람일 것이다. 오늘 이야기할 고흐라는 화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치면 고흐도 성공한 화가일 듯하나 생전의 고흐는 평생 외롭고 쓸쓸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하면 강렬한 노란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 풍경, 자화상을 떠올리지만 나는 위의 ‘씨 뿌리는 사람’을 먼저 소개하고 싶어진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도 목사가 되고 싶었으나 넉넉지 않은 형편에 꿈은 접고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화랑의 판매원으로 일하기도 했으나 사랑도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아 현실에 무력감을 느끼고 27세의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기로 한다. 탄광촌 등에서 노동자와 농민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성실하고 정직한 삶을 화폭에 담았다. 이때의 대표작 ‘감자 먹는 사람들(1985)’을 보면 그가 노동에 얼마나 경외심을 가졌는지 느껴진다. 고흐는 1886년 파리로 와서 당시 유행하던 인상주의 화가들과 어울렸지만 자신의 고유한 화풍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화단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남프랑스 아를에서 고갱과 새로운 예술공동체를 꾸릴 꿈에 부풀어 그린 그림이 ‘씨 뿌리는 사람’이었다. 그림을 보자. 잉태의 준비를 마친 파란 대지 위로 강렬한 태양이 온 하늘을 따뜻하게 물들이고 있다. 지난번에 소개했던 뭉크의 ‘태양’이 주는 힘에 못지않다. 태양을 등에 지고 농부가 힘차게 씨를 뿌리고 있다.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그것을 수확해서 가족이 따뜻한 식사를 함께하는 즐거움, 그 모든 과정의 시작은 씨 뿌리는 행위에서 출발한다. 농부는 아마도 가을의 수확을 기대하면서 만면에 홍조를 띠고 있지 싶다.   아를에서 이 그림 말고도 고갱의 방을 꾸며줄 해바라기 연작을 그리면서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얼마나 설레었을까?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성향이 너무 달랐고 개성이 너무 강했다. 결국 두 달을 못 가 고갱과 심하게 다투고는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는 자해를 하고, 고갱은 아를을 떠나버린다. 상심한 고흐는 생레미의 요양병원에서 우울과 고독 속에서도 지냈으나 죽는 순간까지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림은 그에게 구원이었을 것이다. 1890년 7월 고흐는 밀밭으로가 총으로 자신을 겨누었고 사랑하는 동생 테오의 품에서 37년의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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