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 유두류록길> 들머리인 휴천면 운서리의 600년 전 지명은 엄천리였다. 600년 전 엄천을 지나 지리산을 유람한 김종직 일행은 <유두류록>에서 천왕봉에 있는 사당 성모사를 기술하며 엄천리를 언급하고 있다. “사당집은 겨우 세칸으로 엄천리(嚴川里) 사람이 고쳐지은 것인데, 그 집 또한 판자 집에 못을 박아 매우 튼튼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위로 들려 버린다.” 따라서 엄천리에서 천왕봉을 올랐던 길은 주민이 올라가서 세 칸 사당을 고쳐지었을 정도로 엄천리 사람들의 삶에 뿌리내린 길이었다. 엄천리(운서리)에서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기록속의 암자를 찾아가는 순례길이다. <유두류록> 첫날 여정에 언급된 지장사,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묘정암은 모두 엄천리 뒷산에 있었는데 최근 <지리99>탐구 팀이 10년 이상 치열하게 답사한 덕분에 모두 위치가 확인되었다. 이번에 탐방로가 열리면 새로운 사실들도 많이 밝혀질 것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 그리고 절과 암자가 세월을 다하면 터와 와편을 남긴다. 언제 폐사된 건지 기록도 없는 암자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탐구 팀은 <유두류록>에 나오는 옛 지명 대부분을 찾아내었는데 이 암자들은 거의 천혜의 요새와도 같은 지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국동란 때는 경남인민군유격대 본부가 이 엄천 골짜기에 있었는데 험하고 요새 같은 지형 탓에 아군 토벌대 피해가 막심했다고 한다. 산행 길에서 만나는 금낭 굴 박쥐 굴은 운서마을 주민들도 잘 아는 굴인데 한 때 지자체에서 반공 의식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총을 겨누고 있는 빨치산 유격대의 험상궂은 모형을 요새 같은 굴 입구에 설치해놓은 적이 있다. 이 모형들은 세월과 비바람에 거의 귀신의 형상을 하게 되었는데 멋모르는 등산객이 총부리를 들이대는 귀신을 보고 놀라 기절초풍하기도 했다. 아무리 조악하게 만든 것이라지만 깊은 산속에서 귀신형상을 한 무엇이 불쑥 총부리를 들이대면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가슴이 철렁하게 된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다. 이번에 열리는 <유두류록 탐구길>에서 만나는 첫 번째 절터는 지장사이다. 함양군수 김종직이 유호인, 조위(12년 뒤에 함양군수 부임)등 일행과 같이 현재 운서마을에서 그리 멀지않은 지장사까지는 말을 타고 갔지만 이어지는 산길은 말을 타고는 갈 수가 없는 험산이라 짚신 신고 지팡이 짚고 올랐다고 한다. 지장사는 당시 규모가 제법 큰 절이었는데 김종직 일행의 산행길을 안내한 사람 중 한명은 이 절의 승려 법종이었다고 한다. 지장사는 엄천리(운서리) 산행 들머리에서 멀지 않을뿐더러 말을 타고 올라갈 정도로 길이 좋았고 근처에 노장동이라는 마을도 있었다. 노장동 마을에는 400년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거대한 돌배나무가 있는데 이 거목이 열매를 한번 달면 어마어마한 돌배를 우박처럼 떨어뜨린다. 눈부신 봄날 돌배나무에서 쏟아지는 하얀 꽃비를 맞으며 이 길을 걷는 사람은 삼대에 덕을 쌓은 사람일 것이다. 이 축복은 세상 밖으로 나온 <유두류록길>이 탐방객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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