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오현 일두 정여창을 모시는 남계서원은 함양군 수동면에 있고 정유재란 순국의총의 황석산성은 서하면에 있다. 둘다 국가사적이고 서원은 거기에 더하여 세계문화유산이다. 같이 거론하는 까닭은 책임자 문제 때문이다. 좋은 일의 책임자는 공신이고 나쁜 일의 책임자는 죄인이다. 책임자 처벌은 많이 들어봐도 책임자 포상은 별로 못 들어봤을 것이다. 남계서원 창건의 주역은 조선중기 학자 개암 강익이다. 주역이긴 하지만 혼자 다 한 건 아니고 공동발의, 지원, 협력, 협조자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한 거였다. 그래도 혼자 불굴의 의지로 어떠한 비방과 위협에도 초연히 성사시킨 공로는 칭송받아 마땅하다. <개암집>에 보면 1552년(명종7)에 개암 강익이 박승임, 사암 노관, 매촌 정복현, 남계 임희무랑 서원창건을 논의했다고 하였다. 이들을 남계5현이라고 정의하여 기념한다. 같은 5현인 임희무의 <남계집>을 보면 개암이 임희무, 박승원, 사암 노관, 매촌 정복현과 서원창건을 논의하였다고 했다. 박승원(朴承元)과 박승임(朴承任), 두 인명이 존재하는데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개암집>의 박승임은 오자다. <남계집>의 박승원이 맞다. 그는 추정 1516?년생으로 1518년생인 옥계 노진의 죽마고우, 동문수학한 사이로 친하였다. 박승원이 40대에 별세했을 때 옥계가 만사도 짓고 제문도 지어 애도를 표하였다. 박승원은 그 셋째아우 박승남과 동갑인 청련 이후백의 자형이다. 그 아내 연안이씨는 남편 사후 수십 년 동안 고기도 먹지 않고 추모하며 수절한 열녀이다. 박승원은 옥계, 개암, 남계, 매촌, 그리고 구졸암 양희, 청련 이후백이랑 같이 함양의 큰 스승 당곡 정희보의 알려지지 않은 제자였을 것이다. 반남박씨 명현 춘당 박맹지의 차남 박계간의 사위가 당곡이다. 박승원은 춘당의 증손자이고, 당곡의 처조카이다. 동시에 소수서원을 세운 신재 주세붕의 제자이기도 하니 서원정보 소스는 박승원이 개암에게 제공하여 개암의 남계서원 창건 주동에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반남박씨 박승원을 비롯한 남계오현은 말로만 서원창건에 공헌한 것이 아니다. 모두 공사비용 양곡과 서원비치용 서책을 기부하여 찬조하였다. 박승원은 <가례육권>과 벼 두 섬, 콩 석 되, 논 9마지기를 기증, 1556년(명종11)에 벼 한 섬, 콩 한 되를 추가 기증하고, 서산정씨 정복현은 <이락연원록이권>과 <소학삼권> 및 벼 두 섬, 콩 두 말을 기증, 1556년(명종11)에 벼 한 섬을 추가 기증하고, 풍천노씨 노관은 <이학유편이권> 및 벼 두 섬 8말, 콩 세 말을 기증, 1556년(명종11)에 벼 한 섬을 추가 기증하고, 진주강씨 강익은 <심경일권>과 벼 한 섬, 콩 한 말을 기증, 1556년(명종11)에 벼 한 섬, 콩 한 말을 추가 기증하고, 나주임씨 임희무는 <공자통기이권>과 <주자연보이권> 및 벼 두 섬, 콩 한 말을 기증하고, 1556년(명종11)에 벼 한 섬을 추가 기증하였다. 남계오현이 남계서원의 창건 책임자이고 대표책임자가 개암 강익이다. 박승임은 기부자 명단에도 없다. 박승임으로 저명한 인물에 같은 시기, 같은 반남박씨 소고 박승임이 있는데 그는 영주 출신으로 현풍현감, 진주목사, 창원부사도 지냈지만 함양 서원과는 무관하다. <개암집>에선 함양명필 매암 조식의 식(湜)자도 부(溥)자로 오기했다. 오자는 있기 마련인데 고치지 않고 틀린 걸 고수할, 바로잡지 않고 고집부려 지킬 필요가 있나. <개암집> 필사자나 각수가 우연히 오자 낸 것을 실존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다. 오자는 고치면 된다. 박승임이 아니고 박승원이다. 개암선생은 남계서원을 창건하여 세계문화유산을 남겼는데 <개암문집>은 오자를 1자 남기어 한 사람의, 창건공신 1명의 이름, 명예, 일생, 인생을 말살시켰다.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바로잡고 현창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올해 2023년은 세계문화유산 남계서원 창건주역 개암 강익 선생 탄신 500주년이다. 또한 일두의 수제자 기묘명현 신고당 노우명-남계서원 운영주역 옥계 노진의 부친-의 서거 500주기가 된다. 같은 해에 누군 죽어 슬퍼하고 누군 태어나 기뻐하고 인생사 그러하다. 함양군에서는 탄신기념행사를 성대하게 개최한다. 함양군이 지원하고 남계서원이 주최하여 기념식, 학술회의 등을 개최한다. 개암을 도와 공사비를 대준 함양군수 3인에 대한 고마움을 개암은 누누이 서술하였다. 강당건립의 오유당 서구연, 사당건립의 윤확, 동서재건립의 이계 김우홍 3인의 군수가 남계서원 완공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후손들을 찾을 수 있다면 그 고마움을 표시하여 공로패를 드릴 계획이다.남계서원의 주향 일두선생의 손자 정언남과 그 부인 언양김씨(김중홍의딸) 및 그 아들 정대민-남계오현 임희무의 사위-은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 농성정책에 호응하여 입성했다가 함락되자 부부는 순국하고, 그 아들 정대민은 피신하여 생존했는데 죄책감으로 시묘하며 견지하다가 또한 왜적의 칼날에 순절하였다. 일두가문의 절의정신이 숭상할 만하지 않는가.정 유재란이 발발하자 조정에서는 함양군, 안음현, 거창현의 세 고을 백성들을 황석산성에 입성시켜 사수하게 하였다. 그러나 노약자는 나가게 허용하여 전열이 정비되지 않았다. 성에 안 들어간 거창현감 한형이 성이 부실하다고 한마디 하여 세 고을 사람 10분지 1이나 2 정도밖에 입성하지 않았다. 성이 함락되어 많은 군사와 부녀자들이 전사하고 희생되었지만 몰살된 것은 아니다. 남계서원의 배향, 병자호란의 척화충신 동계 정온은 재란 당시 29세였는데 입성하지 않고 모부인을 모시고 영호남을 유리걸식하였다. 임진왜란의 전쟁일기 <고대일록>을 남긴 고대 정경운도 입성하지 않고 유리걸식하며 생존하였다. 그의 친구 지족당 박명부도 가족이 입성하였다가 노약자 먼저 나가라는 영에 따라 부친 모시고 미리 수령을 하직하고 적상산성에 피난가서 살았다. 감수재 박여량도 의병장으로 입성하였다가 차남이 전사하자 처자식을 이끌고 호서로 피난가서 살았다. 안의 선비 눌계 우형도 가족이 입성하였다가 탈출하였는데 모친이 해를 당하자 복수의 칼날을 갈며 백사림을 참수할 것을 누차 청하였다. 동계의 장인 윤할은 조정의 명령으로 입성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탈출에 성공하여 살았다. 누가 힐난하자 주장이 도망가서 무너졌는데 나 혼자 죽을 이유가 없다고 하니 더 말을 못하였다. 정대익, 정대유 형제도 성이 함락되자 동북쪽으로 탈출하여 용추폭포 쪽으로 오다가 왜적을 만나 모친을 살리고 순절하였다. 함양 선비 유강도 온 가족이 입성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그 모친을 업고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부친이 걷지 못해 성에 있었으므로 그 아우 유가에게 모친을 모시고 가게 하고 유강은 다시 성에 들어가 부친을 업고 나오다가 같이 왜적의 칼날에 순절하였다. 사내종 박은호는 가족과 같이 입성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탈출에 성공하였다. 부친이 성에 있는 것을 알고 다시 성에 들어가 부친을 모시고 나오다가 성 아래에서 왜적의 칼날에 같이 순절하였다. 함양 선비 서계 양홍주도 황석산성에 입성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탈출에 성공하여 유리걸식하며 생존하였다. 그 처참한 양상을 시를 지어 표현하였다. 그렇듯 많은 사람이 탈출하여 생존하였다. 세 고을의 수령 전 함양군수 대소헌 조종도와 안음현감 곽준은 순국하고 거창현감 한형은 군사모집건으로 밖에 있다가 살아남고 그 부인은 남편 찾아 나가면 남편 명예를 실추시킬까 하여 딸과 함께 성을 사수하다가 순국하였다. 일곱 고을 군사와 주민 수만 명이 입성하였다고 하는 소리도 있으나 다른 고을 수령이 누가 들어온 적이 있는가. 낭설이다. 황석산성이 함락되자 또 책임자 색출이 시작되어 전투부대장 김해부사 백사림이 먼저 탈출, 함락의 빌미 제공자로 낙인찍혀 국민적 원흉이 되어 책임자 처벌의 외침 속에 처벌받고 살아났다. 책임자는 죽여야 된다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일사부재리, 윤허가 나지 않아 끝까지 살다가 죽었다. 동계 정온은 처벌강경론자고 그 친구 지족당 박명부는 처벌온건론자였다. 박명부는 한때 성에 있었으니, 백사림과 면식이 있었을 것이다. 알면 평가는 달라진다. 백사림은 무장으로서 도망가서 살아남아 치욕스런 삶을 살았지만 책임자 참수형은 면하였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책임질 일은 책임지고 책임자는 응분의 대가나 대우를 받아야 한다. 상벌이 분명하고 적절해야 한다.개암 강익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행사는 남계서원 창건주역에 대한 책임자 포상, 창건공신 현창에 해당하여 크게 경하할 일이다. 그러나 그 <개암집> 때문에 500년 동안 묻힌 창건5현의 일인, 함양선비 박승원의 억울함은 어찌할 것인가. 그를 비롯한 5현의 남계서원 창건론 공로에 대해 공적비를 세워주지는 못할망정 함양군수는 공로패라도 추증하여 기리는 것이 어떠한가. 책임자 처벌만 외치는 세상이 좋좋은 세상인가. 책임자의 공로 포상을 외치는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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