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마음씨가 좋아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직장을 다니던 A씨는 출퇴근길에 늘 만나게 되는 사람이 있었다.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노숙자였다. 그 날도 A씨가 퇴근하는 길에 구걸하고 있는 노숙자를 만나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었다. 그랬더니 그 노숙자가 “선생님, 그렇지 않아도 궁금한 게 있어서 물어보려고 했습니다”라며 길 가는 A씨를 불러 세웠다. A씨는 “아, 그러세요. 뭐가 그리 궁금하셨는데요?”라며 노숙자의 말을 들어주었다. 노숙자는 이렇게 말했다. “전에는 선생님께서 저에게 늘 만원씩 주셨습니다. 그러더니 어느 때부터인가 오천 원씩 주셨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들어서는 천 원씩 밖에 안 주시니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더란다. 그 말을 들은 A씨가 이렇게 대답했다. “아, 그거요? 그거야 몇 년 전에는 제가 총각이었으니까 만원씩을 드렸었지만, 작년엔 제가 결혼을 했거든요. 그래서 오천 원씩 드렸던 겁니다. 그리고 올해엔 제가 아들을 낳았어요. 그래서 천 원씩 밖에 못 드리는 겁니다” 그랬더니 그 거지가 벌컥 화를 내더란다. “아니, 뭐요? 그럼 지금까지 내 돈을 가지고 당신의 가족을 부양해 왔단 말이요?” 그냥 웃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어디 그 노숙자뿐이겠는가?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다. 도움을 받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 되는데, 도무지 감사할 줄을 모른다. 도움을 받는 입장에서 감사는커녕 오히려 더 큰 소리를 치는 게 세상 사람들이다. 아주 오래 전에 필자는 청주에 가서 기아와 난민들을 위한 자선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 파키스탄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폐허 속에 버려진 파키스탄 국민들을 돕자는 뜻이었다. 그 당시 지진 피해가 가장 컸던 카슈미르 발라코트시는 마치 폭격을 맞은 것 같았다. 건물이라는 건물은 다 무너졌고, 학교 건물 더미에 깔려 죽은 어린이들을 비롯해서 파키스탄 전국에서 수 만 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난민들은 다리가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배에 물이 차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마취도 안 된 상태로 다리를 자르거나 배를 가르는 수술을 해야 하는 절박한 모습이 영상을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도시 전체가 설사와 홍역, 폐렴과 같은 전염병이 돌았었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최근에 일어난 튀르키예-시리아의 지진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가난과 전쟁, 그리고 지진과 테러 등의 위협에 노출되어 죽음의 문턱에 놓여있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진짜 불쌍한 이유는 찢어지게 가난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복음을 한 번도 전해 듣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들 뿐 아니라, 주님의 심판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알지 못하고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다가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혼들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다. 요즘 밤에는 안개가 많이 껴서 운전하기가 얼마나 불편한지 모른다. 안개가 잔뜩 낀 시골길을 한 밤중에 운전해서 갈 때에는 더듬어서 가야 될 정도다. 그러나 안개가 걷히고 길 좌우에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는 고속도로에 접어들게 되면 시속 100km로 달려도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달릴 수 있다. 어둠 속에 있으면 방향감각이 없어진다. 내가 정말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건지, 내 앞에는 도대체 어떤 장애물이 놓여있는지, 그리고 목표는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성경은 심판의 때가 도적같이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있어서 근신해야 한다. 어둠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도무지 알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낮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항상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또한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무장이 필요하다. 사람의 몸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머리다. 팔이 잘라져도 살고 다리가 잘라져도 살지만 목이 잘라지고 없는데 살아서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다. 그 다음에 또 중요한 곳이 가슴이다. 가슴 속에 심장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판단하려면 제일 먼저 심장이 뛰는지 안 뛰는지 그것을 살펴보고 ‘사람이 죽었다 살았다’를 판단하게 된다. 온 몸에 피를 보내는 기관이 심장이기 때문에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두껍고 딱딱한 두개골이 있는 것처럼 심장을 보호하기 위해서 갈빗대가 있다. 그래서 옛날 장수들도 심장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슴에 흉배를 붙이고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다녔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하는 우리들도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여야 한다. 그리고 구원의 소망이라는 투구도 써야 한다. 소위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고 낮에 속한 빛의 아들들이라고 자처하는 우리 믿는 이들이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고 더구나 구원의 확신도 없고 구원에 대한 소망도 없다면 되겠는가?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어둠 가운데 있다가 홀연히 임하는 주님의 심판을 당하는 저희들을 너희가 보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모두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며 살아야 한다. 어두움에서 방황하는 무리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쳐야 한다. 오랜 추위를 이겨내고 매화가 만개하는 이 시절에 우리들의 사랑도 한껏 꽃을 피울 수 있어야겠다.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에게는 한 마디 위로의 말 보다는 당장 필요한 물질과 양식이 더 시급하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도 누군가의 작은 정성이 어둠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우리의 이웃을 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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